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만남 요청에 응해 오는 5월 안에 보겠다고 천명한 것은 북한이 우리 정부를 통해 전한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을 직접 대면해 확인하려는 차원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최근 우리 정부의 대북특사와 협의한 후 대화 지속 등을 전제로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겠다는 ‘조건부 핵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만큼 최소한 5월까지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한반도 긴장 완화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정상 간 파격적인 회동 결심이 실제 정상회담으로 이어지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이 8일(현지시간) 방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을 통해 트럼프 정부에 전한 비핵화 의지에 관해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을 내놓고 이행하는 후속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美에 전한 北 메시지 뭔가=이와 관련해 우선 정 실장이 8일 미국 측에 전한 김 위원장의 메시지 등을 먼저 철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내용이 담겼길래 트럼프 대통령이 단박에 5월 내 북미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밝혔는지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실장이 백악관 브리핑을 통해 공개한 북측 메시지의 키포인트는 ‘추가 핵·미사일 시험 중단’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핵 모라토리엄은 앞서 지난 6일 정 실장 등이 대북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뒤 발표한 방북 결과에서 이미 공개된 내용이다. 정 실장은 이번 방미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추가적으로 전할 북한의 메시지가 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 ‘추가적 메시지’가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추가적 메시지’에는 미국이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북한이 핵 동결 및 폐기 조치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겼을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중단한다면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핵시설 및 무기에 대해 사찰을 받을 용의가 있다는 뉘앙스 등의 파격적 카드가 담긴 김 위원장의 구두발언이 ‘추가적 메시지’에 포함됐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 밖에도 4월에 재개되는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이해한다거나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균형 차원에서 주한미군 등 미국의 일정한 역할을 인정한다고 언급하는 식의 내용이 담겼을지 주목된다. 정 실장이 8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파격적 카드를 시사하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文 정부에 신임 보인 트럼프=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대범했다. 메신저 역할을 한 정 실장에게 “부탁이 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한국의 대표들이 오늘 논의 내용을 한국 대표의 이름으로 백악관에서 직접 발표해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의 국가원수가 접견 결과를 자신의 대변인이 아닌 타국의 안보실장에게 백악관에서 단독으로 발표하도록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배려”라고 놀라워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북미 중재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한다는 방증으로도 해석되는 장면이다.
실제로 정 실장은 이날 접견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저를 여기 보낸 것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드리고 앞으로도 한미 간 완벽한 공조 이뤄내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신뢰를 사기 위해 집중했다. 또한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트럼프 대통령이 큰 힘이 됐고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며 “우리나라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목사님 5,000명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하셨다”고 접견 자리에서 말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한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고 화답했다. 이어서 배석자들을 둘러보며 “거 봐라. 얘기를 하는 게 잘하는 것”이라며 우리 정부의 대북대화 의지에 힘을 실어줬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와 우방국들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북한이 그들의 언사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줄 때까지 압박을 지속할 것임을 강조하는 데 있어 단합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의 노력을 평가해 북미대화의 문을 열기는 하지만 북한이 혹시 위장평화전술을 펼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도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