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패권을 둘러싼 글로벌 무역전쟁에서 강대국들이 국익 극대화를 겨냥해 경제·통상정책의 큰 그림을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특히 중국을 때려 무역적자를 대폭 줄이면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등을 미국 측에 유리하게 바꿔 글로벌 무역질서의 재편을 꾀하고 있다. 중국은 쉽사리 미국의 패권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다자체제에 기반, 보호무역주의에 반발하는 유럽연합(EU) 등과 연대해 자유무역의 주도권을 쥐는 역공에 나섰다. 일본도 미국이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부활을 이끌며 아시아태평양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등 존재감을 확대해가고 있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과 신카르텔을 형성하며 원유 감산을 지속해 미국의 셰일 파워에 맞서 대항에 들어갔다.
미국은 지난해 트럼프 정부 출범 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통상정책에 최우선 적용할 것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무역관계보다 자유무역협정(FTA) 등 양자협정에 무게를 싣고 세계 무역의 판을 새로 짜고 있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 FTA도 미국의 수출을 늘리고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도록 재협상을 추진해왔는데 중국을 재협상의 지렛대로 쓰는 모습이다. 지난해 3,75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해 미국의 최대 무역적자국인 중국에 통상 보복을 취하면서 FTA 재협상 국가에는 무역제재를 면제해주는 선심을 쓰는 수법으로 일석이조를 노리는 전략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1일 미국이 수입하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지만 나프타 상대국인 캐나다와 멕시코를 1순위로 면제한 후 FTA 개정 협상이 진행 중인 한국과 무역적자가 크지 않은 호주·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을 면제 대상국에 포함했다.
트럼프 정부는 철강 관세 면제 등을 앞세워 나프타와 한미 FTA를 유리하게 개정, ‘골드스탠더드(황금률)’로 만든 후 향후 다른 나라들과의 FTA에 적용할 심산이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EU를 탈퇴한 영국과 FTA 체결을 협의 중이다. 미 측은 양자무역협정에 집중하면서 WTO 체제는 무시하고 있다. EU·한국 등은 1월 미국의 태양광 패널 세이프가드 발동에 따른 보상 등 구제 조치를 WTO 규정에 근거해 요구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거부한 바 있다.
중국은 미국의 보호무역에 각을 세우며 자유무역 수호자를 자처하는 한편 WTO 가입 이후 세계 최대 수출국으로 올라선 만큼 WTO 체제도 적극 옹호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의 새 외교 정책인 ‘신형 국제관계’를 앞세워 한국 등 16개국이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조속한 타결을 추진하는 동시에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창설을 시도하고 나섰다. 아시아태평양 역내 국가 간 무역장벽을 허물고 중국이 주도하는 하나의 경제권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에는 TPP에서 빠진 미국의 공백을 파고들어 세계 통상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노림수가 포함돼 있다.
중국은 아울러 다자체제를 배척하고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미국에 불만이 많은 EU 등과 힘을 모아 미국과의 무역전쟁에 우군을 늘려나가고 있다. 특히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적극적인 경제 원조와 군사적 지원까지 동원해 중국의 경제 지평을 한층 넓혀나가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TPP에 불참을 선언해 중국이 RCEP를 필두로 아태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자 일본은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TPP를 살려냈다. 일본은 8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캐나다·멕시코·호주·베트남·말레이시아·페루 등 11개국이 참여하는 TPP 협정문에 최종 서명했다. TPP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자간 FTA 중 하나로 11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경제의 13.5%를 차지하며 시장 규모는 EU보다 많은 5억명에 달한다. 일본은 또 중국과 껄끄러운 관계인 13억 인도와 전략적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인도에 고속철도 수출에 이어 원전 관련 기자재와 기술까지 전수해 경제뿐 아니라 안보 분야 협력 확대도 기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해 미국·EU 등의 경제 제재에 시달리고 있는 러시아는 사우디 등 중동 산유국과 신카르텔 체제를 구축해 국제유가를 떠받치며 경제적 활로를 개척해가는 중이다. 미국이 셰일가스와 원유 생산을 늘리며 국제유가가 급락하자 러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손잡고 감산을 계속 연장해 유가를 배럴당 60달러 이상에 안착시키며 서방의 압박을 돌파해가고 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시베리아 천연가스를 중국에 공급해 외화 수입을 늘리면서 중국의 ‘일대일로’와 위안화 국제화 등을 지원하며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약화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