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明鏡止水] 스트레스는 게스트다

월호스님 조계종 행불선원 선원장

스트레스 받으면 꽃피우는 蘭처럼

적당한 스트레스는 수행에도 도움

붙들고 자꾸 건드리면 더 커질뿐

얼른 대접해서 빨리 보내는게 상책

월호스님월호스님




0115A27 스트레스


한때 방에서 난초를 키운 적이 있다. 특히 동양 난은 꽃을 피우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방에만 오면 쉬이 꽃을 피우는 것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식물을 키우는 데 큰 관심이나 별다른 소질이 없는 필자로서는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윽하기 짝이 없는 난초의 향을 즐기며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난초 전문가가 왔길래 자랑을 했다. “난초가 제 방에만 오면 꽃을 잘 피웁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자 난초 전문가가 대뜸 말했다. “난초에게 스트레스깨나 주시나 봅니다.”

“네에? 그게 무슨 말이죠?”

“난초는 모든 상황이 적당하고 좋으면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적당히 스트레스를 줘야 씨앗을 남기기 위해서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별다른 영양분 공급도 하지 않고 물도 제때 주지 않았던 것이다. 건망증이 심해서 이삼일에 한 번, 또는 이삼 주에 한 번씩 주기도 했던 것이다.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난초가 대단해 보였다. 스트레스를 꽃피우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인간보다 나은 것이다.

깨달음의 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스트레스가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닥쳐오는 스트레스의 일어남·사라짐을 지켜보면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깨달음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지 않을까.

사는 것도 스트레스요, 죽는 것도 스트레스다. 삶과 죽음 자체가 스트레스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잘 살고 잘 죽으려면 스트레스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트레스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능엄경(참선수행법을 다룸)’에서는 말한다. “손가락은 쥐락펴락해도 그대의 보는 성품은 부동이요, 티끌은 움직여도 허공은 부동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요동하는 것으로 티끌을 삼고 머물지 않는 것으로 손님을 삼아야 한다.”


스트레스는 게스트다. 주인이 아닌 길손이라는 것이다. 손님이 왔으면 얼른 대접해서 빨리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이미 방문한 손님을 인사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면 성질나서 행패를 부릴 수도 있다. 또한 너무 극진히 대접해서 오랫동안 눌어붙도록 놓아두게 되면 주인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자칫 주인 노릇을 대신할 수도 있다. 이래저래 번잡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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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오면 우선 인사부터 하는 것이 예의다. 아는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먼저 이를 알아차리고 인사를 해야 한다. “네, 스트레스 고객님, 오셨군요.” 이런 식으로 먼저 알아차리고 인정을 해준다. 그런 다음에는 되도록 빨리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제가 하던 일이 있어서요. 웬만하면 다음 기회에….” 그리고는 얼른 본분 수행으로 되돌아가면 최상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쉽게 돌아가지 않는 손님도 많다. 그럴 경우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즉 스트레스가 생겨나고 치성하게 머물렀다 점차 사그라져서 마침내 사라지는(생주이멸·生住異滅) 과정을 대면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 유념할 것은 다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붙들고 시비하거나 자꾸 건드리면 스트레스가 더욱 커질 수 있다. 이렇게 하자면 절대적으로 닉네임이 필요하다. 스트레스를 ‘나’의 것으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닉네임’의 것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자신의 닉네임을 붙여서 ‘닉네임’의 스트레스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스트레스는 더 이상 ‘나’의 스트레스가 아니고 ‘닉네임’의 스트레스가 된다.

닉네임은 물론 진짜 이름이 아니다. 거짓 이름이며 임시 이름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닉네임의 스트레스는 당연히 실체가 없다. 허상인 것이다. 허상은 허상인 줄 알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중론(인도 승려 용수가 짓고 구마라집이 한역)’에서는 말한다.

‘인과 연으로 생겨난 존재를(因緣所生法)

나는 곧 공이라고 말한다(我說卽是空).

또한 이것은 닉네임이며(亦爲是假名)

또 이것이 중도의 뜻이다(亦是中道義).’

번거롭다고 해서 손님이 오지 않기만 기대해서도 안 된다. 가끔 손님이 와야 집안을 돌아보게 된다. 정리정돈도 새롭게 하고 대청소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는 손님 막지 말고 가는 손님 잡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생활 속 수행이다. 그러므로 스트레스가 없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스트레스가 있어야 진전이 있다. 오는 스트레스 막지 말고 가는 스트레스 잡지 말자. 다만 지켜보고 지켜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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