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수십년 쌓은 반도체 기술이 '등기우편' 한통에?...커지는 보고서 공개 논란

고용노동부가 삼성그룹 전자 계열사들의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공장의 공정 정보가 담긴 ‘작업환경 측정결과보고서’ 공개를 추진하면서 정부 방침에 대한 적정성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하고 있다. 보고서 공개 논란을 둘러싼 주요 쟁점과 사태 확산 과정을 정리했다.

◇ “보고서에 영업비밀 없어” 논란 시발점 된 대전고법 판결


10년 이상 끌어온 논란이 최근 불붙는 발단이 된 것은 대전고등법원이 내린 지난 2월 판결이다. 삼성전자 온양 반도체공장 산업재해 피해자들은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산업재해 입증을 위해 작업환경 측정결과보고서 공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지금까지 고용부는 기업 영업비밀에 해당한다고 판단, 보고서 공개를 거부해 왔다. 하지만 대전고법은 보고서에 영업비밀로 볼 만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며 정보공개를 결정했다. 고용부는 법원 판단을 근거로 들어 보고서 공개를 결정했다.

고용노동부는 해당 사업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측정보고서 공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보고서에 영업비밀은 없다’는 대전고법 판결까지 들어 보고서 공개가 영업비밀 유출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 알 권리도 곁들였다. 고용부는 “설령 해당 정보가 기업의 경영·영업상 비밀이더라도 사업활동으로 발생하는 위해로부터 생명·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공개돼야 한다는 게 법원 판시”라고 강조했다.

반면 산업계는 ‘기업 현실을 전혀 모르는 처사’라며 고용부 판단에 펄쩍 뛴다.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작업자 수와 공정 배치도 등을 업계 전문가들이 보면 한 눈에 전체 공정 설계의 틀과 설비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보고서를 봤을 때는 영업비밀이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척하면 척’인 전문가들이 보면 당연히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치열한 첨단 기술 경쟁이 벌어지는 글로벌 산업계에서 공정 노하우를 경쟁 업체에 송두리째 내주는 꼴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사진제공=삼성전자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사진제공=삼성전자



◇ “왜 제3자에게까지?” 논란 일으키는 공개 범위

문제를 더 키운 것은 고용부가 보고서를 산재 피해자뿐 아니라 정보공개를 요청한 종편 PD 등에도 공개하기로 한 결정이다. 시민단체와 방송사는 문제가 된 삼성전자 온양사업장 뿐 아니라 기흥·화성·평택 사업장은 물론 삼성디스플레이 탕정 공장, 삼성SDI 천안 공장까지 줄줄이 작업환경 측정결과보고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삼성 관계자는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열람을 하든지, 영업기밀에 해당하는 부분은 가린 채 공개를 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전면 공개한다는 것은 수용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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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후 진행은?

영업 비밀이 까발려질 위기에 처한 삼성 계열사들은 부랴부랴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제기해 공개를 막았다. 삼성전자는 법원에 행정소송도 냈고, 산업통상자원부에는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는 지 판단해달라고 SOS를 쳤다. 산업부가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볼 경우, 삼성은 그 결과를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삼성 관계자는 “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법원이 만약 삼성의 정보공개 결정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난 20~30년 간 쌓아 온 반도체 공정 정보가 ‘등기 우편’ 한 편에 외부에 넘어가 버리게 된다. 정보공개 청구 절차 상 요구 내용은 등기 우편 등의 방법을 통해 청구자에게 보내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 수출을 먹여 살리는 반도체 기술 발전은 선배들이 수기로 수첩에 기록해 가며 쌓아 온 자산”이라면서 “하물며 음식점도 자신들의 레시피(조리법)를 공개 안 하는데 기업의 공정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라는 건 납득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 보고서 논란 더 키우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작업환경 측정결과보고서 공개 여부를 놓고 논란이 확산하는 와중에 고용부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화학물질 제조·수입자는 제품명, 구성물질명, 함유량, 유해·위험정보 등을 기재한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고용부 장관에게 의무 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밝혀 또 다른 논란이 일고 있다. 기업에 생명과도 같은 조업 비밀을 정부가 틀어쥐고 경우에 따라 외부에 공개하는 게 과연 합당한 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성분을 어떻게 배합하고 다른 추가 재료를 무엇을 쓰는지를 알게 되면 역으로 여러차레 실험을 거쳐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서 “경쟁업체들이라면 충분히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얘기”라고 우려했다.

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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