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대본은 기계...배우 달라도 같은 결과물 만들죠"

연극 '낫심' 공연 위해 내한한 이란 작가 술리만푸어

연출없이 매일 즉흥적으로 진행

이번 공연에선 직접 무대 출연도

작가·배우·관객 모두가 80분간

아이같은 순수성 경험하게될 것

연극 ‘낫심’을 쓴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은 공연 이틀만에 두 손 가락으로 작은 하트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한글 한 자 읽고 쓰지 못했던 그가 요즘은 한글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 /권욱기자연극 ‘낫심’을 쓴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은 공연 이틀만에 두 손 가락으로 작은 하트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한글 한 자 읽고 쓰지 못했던 그가 요즘은 한글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 /권욱기자



관객들의 박수 속에 한 배우가 무대에 섰다. 배우도, 관객도 오늘 공연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상자 안에서 지시사항이 적힌 종이를 꺼내 들자 스크린에 진짜 대본이 등장한다. 456페이지의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배우를 울고 웃게 만드는 손에는 왠지 털이 수북하다. 그는 자신을 연극 ‘낫심’을 쓴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라고 소개한다. 그가 쓴 대본이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고 관객들은 함께 목소리를 내거나 무대 위에 올라 함께 공연을 완성한다. 작가가 때론 관객이 되고 배우는 작가나 연출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배우가 되기도 한다. 그 누구도 고정된 역할을 맡지 않지만 극은 완성된다. 어느 날은 모두가 80여분을 유쾌하게 웃다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며 극장을 떠나고 어떤 날은 공연 시작 10분도 안 돼 눈물바다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리허설 없는 우리 삶과 같다.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가 한국의 관객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Studio Doug 제공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가 한국의 관객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Studio Doug 제공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1인 즉흥극 ‘빨간토끼 하얀토끼’로 한국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술리만푸어가 지난 10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개막한 ‘낫심’ 공연을 위해 내한했다. 지난해에는 대본을 통해서만 관객과 만났던 그가 이번 공연에는 직접 출연한다. 11일 전석호 배우와 공연을 마친 그를 극장에서 만났다.




1막에선 스크린 속에만 머물던 낫심 술리만푸어가 2막에서는 무대 위로 등장한다. /David Monteith-Hodge 제공1막에선 스크린 속에만 머물던 낫심 술리만푸어가 2막에서는 무대 위로 등장한다. /David Monteith-Hodge 제공


이란에서 병역을 거부하면서 여권을 빼앗긴 그는 해외여행을 금지당했고 그때부터 그가 쓴 대본을 전 세계에 우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후 아비뇽 축제 등 세계적인 공연예술제에서 잇따라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고 그를 대신해 그의 말과 글이 전 세계를 여행했다. “입력값과 처리 과정이 매번 달라도 같은 결과물을 내는 기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처지 때문이었다. 작가를 떠난 대본이 언제, 어디서, 누가 공연하든 관객들에게 스며들어야 했다.

“대본은 ‘기계’예요. 매일 다른 배우나 관객이 공연하고 그 과정도 공연마다 다르지만 결과물은 특정해야 합니다. ‘낫심’은 내가 한국말을 배우고 배우와 관객들이 이란어를 배우는 여정을 함께 하며 극장을 떠날 때쯤 우리 모두가 친구라는 느낌을 받고 떠나게 되죠. 하지만 극의 흐름은 매일 달라집니다. 배우와 관객이 만들어내는 즉흥성의 힘이죠.”

1막에선 스크린 속에만 머물던 낫심 술리만푸어가 2막에서는 무대 위로 등장한다. /David Monteith-Hodge 제공1막에선 스크린 속에만 머물던 낫심 술리만푸어가 2막에서는 무대 위로 등장한다. /David Monteith-Hodge 제공


최근 그는 병역 문제에서 벗어나면서 이란을 떠나게 됐고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에겐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의 언어로, 그의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이란에서 공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 쓴 작품이 산들바람이라는 뜻을 지닌 그의 이름을 본뜬 ‘낫심’이다. ‘이야기는 산들바람 같아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배우 한예리가 12일 서울 종로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낫심’에서 1인 즉흥극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두산아트센터배우 한예리가 12일 서울 종로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낫심’에서 1인 즉흥극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두산아트센터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번 공연은 작가도, 배우도, 관객도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보는 경험이다. 서툰 어린아이에게 모두가 관대하듯 한국말에 익숙지 않은 작가도, 대본을 처음 받아든 배우도, 극의 형식 자체가 낯선 관객도 80분간 어린아이 같은 순수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얘기다. “영어나 스페인어로 공연할 땐 의미라도 짐작할 수 있지만 공연 첫날만 해도 대본에 적힌 한국어가 암호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제 나는 엄마, 사랑, 반찬, 돌솥비빔밥 같은 단어를 알게 됐어요. 21회 공연을 마치면 나는 더 많은 한국어를 알게 되고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엔 어머니를 위한 공연을 만들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전세계를 돌며 공연한 그가 더 많은 치유를 받았다. 연극 ‘낫심’의 낫심 술리만푸어 작가. /권욱기자처음엔 어머니를 위한 공연을 만들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전세계를 돌며 공연한 그가 더 많은 치유를 받았다. 연극 ‘낫심’의 낫심 술리만푸어 작가. /권욱기자


그의 작품이 매번 세계 연극계의 주목을 받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대본이 일으키는 관계의 전복 탓이다. 연출 없이 매일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공연에서 배우는 연출이 되기도 하고 작가조차 극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다. 관객도 배우나 연출이 되어 흐름을 이끈다. 특히 이번 공연에는 일부 대사를 빈칸 처리해 배우와 관객의 이야기로 채울 수 있게 했다.


“‘빨간토끼 하얀토끼’를 본 전 세계 관객들로부터 매일 수십 통의 이메일을 받았어요. 그들의 경험, 역사가 담겨 있었죠. 이들에게 일일이 답장하는 대신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연을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낫심’은 그 시작이고, 후속작인 ‘블랭크’는 빈칸으로 가득한 400페이지 분량을 대본을 매일 배우와 관객이 탄생시키는 작품이죠. ‘블랭크’ 역시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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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의 형태 역시 그에겐 중요한 관심사다.

“안톤 체홉이나 셰익스피어의 대본처럼 보일 필요는 없어요. 대본이 40페이지에 머물 필요도 없고 하트나 스마일 이모지, 차트나 표를 쓰면 안 된다는 법칙도 없죠. 나의 대본은 다른 작가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입니다. 함께 형식을 무너뜨리고 탐험해보자고 손을 내미는 거죠.”

요즘 그의 걸음은 연극 밖을 향하고 있다. 조만간 요리책을 한 권 펴내겠단다.

“배우가 대본을 받아들고 즉흥극을 하듯 우리는 요리책을 단 한 번 읽고 음식을 만들죠. 전세계를 돌며 여러 나라 요리사들과 레시피를 준비할 겁니다. 무대에 부엌을 세우고 매일 새로운 배우가 요리법대로 음식을 만들며 이야기를 할 거예요. 공연이 끝나면 모두가 음식을 나눠 먹죠. 처음에는 부엌을 극장으로 가져오지만 여러 나라를 돌며 공연한 레시피와 이야기를 요리책으로 묶어내면 그걸 읽을 때마다 극장이 내 집 주방으로 들어옵니다. 한국의 비빔밥도 넣을 생각이에요.(웃음)” 2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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