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지배구조 개혁 무엇이 문제인가]기업 투명성 높인다지만...한국식 스피드 경영·미래 투자엔 부담

<2> 이사회 경영의 그늘

임기 정해진 이사들 장기적 비전보다 단기 이익에 더 관심

헤지펀드 등 공격에도 취약...GE도 행동주의 펀드에 흔들

장·단기 경영판단 주체 구분, 투자 등 결정은 오너가 해야

장동현 SK(주) 사장이 지난달 26일 서울 서린동 사옥에서 열린 SK(주)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SK(주)는 이사회중심 경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주총에 전자투표제까지 도입해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였다. /사진제공=SK(주)장동현 SK(주) 사장이 지난달 26일 서울 서린동 사옥에서 열린 SK(주)주주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SK(주)는 이사회중심 경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주총에 전자투표제까지 도입해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였다. /사진제공=SK(주)



제프리 이멀트 미국 제네럴일렉트릭(GE) 회장은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듬해인 지난 2002년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한다. “이사회는 GE의 가장 현명하고 냉정한 비판가인 동시에 컨설턴트다. 이사회는 GE가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경영의 신’으로 불리던 전임자 잭 웰치 회장에 이어 CEO가 된 이멀트는 과거와 같은 리더 중심 경영이 아닌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드라마 같은 혁신을 이끌어냈다. 디지털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해 한때 실리콘밸리 인재를 싹쓸이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직원에 대한 1년 단위 평가를 없애 장기적 비전 실현에 업무의 중심을 두도록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25억달러로 지분 1%를 확보한 행동주의 펀드 ‘트라이언펀드매니지먼트’가 “주가가 낮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자 이멀트 회장뿐 아니라 이사회 전체가 흔들렸다. 결국 이멀트 회장은 2017년 6월 사임한다.


이사회 중심 경영의 명과 암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사회 중심 경영은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시스템에 의한 경영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오너 경영자의 판단 미스를 차단하는 장치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기업의 상당 지분을 외국인이 가지고 있을 경우 외부 공격에 매우 취약하고 경영목표를 주가·이익 등 단기성과에 두기 쉽다. 무엇보다도 한국 고유의 스피드 경영을 저해한다는 것이 취약점이다.

◇경영 투명성·안정성 확보에는 유리=한국에서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가장 먼저 대외적으로 선언한 대기업은 SK다. 최태원 회장은 2004년 ‘오너 경영’이 아닌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했다. 이사회에 ‘혁신의 주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대주주는 혁신의 지원자, 외부의 모든 이해관계자는 혁신의 감시자라는 역할 모델을 제시했다.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하되 사외이사추천위원회를 외부에 둬 대주주의 개입을 막았고 대주주의 뜻을 관철하고 싶을 때는 최 회장이 사외이사들과 직접 만나 현안을 설명했다.

현재 SK가 정유·화학·통신·반도체에서 매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게 된 기반은 당시의 이사회 중심 경영이다. 특히 총수 일가 부재 시 회사가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간 것은 이사회 중심 경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최근 사회 전반적으로 투명경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삼성전자와 삼성물산도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23일 주주총회에서 “이사회가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기구로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최대 기업도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한 것이다.

관련기사



◇한국식 ‘스피드 경영’ 실종 우려도=그러나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이사회 중심 경영은 특성상 단기성과를 중시하기 마련이다. 4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임기가 정해진 이사들은 자신의 임기 내에 성과를 내고 싶어 해 장기적인 비전보다 단기이익이 더 큰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헤지펀드 등 외부 투자가가 이사진에 참여하게 되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단기자본은 고배당 또는 시세차익을 창출하기 위해 투자한다. 기업의 미래가치 창출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헤지펀드가 이사진에 들어와 고배당을 결정하면 투자 여력이 줄어든다. 단기에 주가를 부양하기 위해 핵심자산 등을 매각하면 기업의 장기 경쟁력이 훼손된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이사회 중심 경영으로 투명성을 높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도 “의사결정 지연, 단기자본에 대한 취약성, 경영의 보수화라는 세 가지 부작용이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사회 소집, 안건 설명, 반대이사 설득 등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 경영상 의사결정의 타이밍을 놓칠 수 있고 단기자본이 주주로 들어와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때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사들이 향후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행동할 경우 경영활동 전반이 보수화된다”는 게 재계의 지적이다.

유 팀장은 ‘스피드 경영’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을 최대 부작용으로 꼽았다. 그는 “한국 기업은 특유의 역동성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절차적 투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한국 기업의 장점이 퇴색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장단기 경영판단 주체 나눌 필요도”=대안은 있을까. 재계 전문가들은 “오너 경영과 이사회 경영을 절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인 경영상 의사결정은 이사회에 맡기되 리스크 부담을 져야 할 때는 오너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너무 많은 것을 이사회로 넘기면 안 된다”면서 “장기적 비전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투자 등 판단은 임기와 책임에서 자유로운 오너가 하고, 단기목표나 일상적인 경영에 대한 판단은 이사회가 하는 것이 한국 실정에 가장 잘 맞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경영 판단을 이사회의 몫으로만 국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경영자가 뭔가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배임죄로 처벌받을 걱정을 하지 않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맹준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