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세균 국회의장 자문위원회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하여>라는 정책연구 보고서를 완성한 바 있다. 국민들의 행복 증진을 위한 정책 대안 제시를 통해 한국이 ‘행복국가’로 나아가는 데 의미 있는 디딤돌 하나를 놓자는 취지의 결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를 총괄한 윤성식 자문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을 만나 ‘행복론’에 대해 들어봤다. 윤 교수는 얼마 전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이라는 책도 출간할 만큼 평소 ‘행복’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자다.◀
우리 사회는 치열한 경쟁과 취업난, 양극화, 공동체 가치 퇴색 등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국민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다. 한마디로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젊은 층에서 회자되는 ‘헬조선’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의 오늘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다. 인류의 행복에 관해서는 유엔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매년 <세계행복보고서>를 통해 세계 각국의 행복도를 조사·발표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유엔은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선택의 자유 등 여러 지표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각국의 행복도를 산출한다.
우리나라는 지난 3월 유엔이 발표한 <2018 세계행복보고서>에서 156개국 가운데 57위를 기록했다. 특히 걱정스러운 대목은 한국의 행복도 순위가 갈수록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행복도 순위는 지난 2013년 41위에서 불과 5년 만에 16계단이나 후퇴했다.
국회의장 자문위원회가 국민 행복 증진을 위한 정책 대안 제시에 나선 것도 ‘불행한 한국’이라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는 윤성식 자문위원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나서서 국민 행복 증진을 위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세균 국회의장도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를 보냈다. 그 덕분에 자문위원회 산하에 ‘한국형 행복국가 소위원회’를 설치하고 국민 행복을 위한 정책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형 행복국가 소위원회는 행복 관련 전문가 10여명이 참여해 국내 초유의 연구 프로젝트를 가동했고, 그 결과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하여>라는 보고서로 나왔다.
한국은 행복의 표준편차가 심한 나라
윤성식 위원장이 말한다. “행복에도 표준편차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좀 심하게 나타납니다. 개인 간에 행복의 불평등 정도가 크다는 뜻이죠. 유엔 행복도 평가를 보면 상위 10위권 국가는 거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 10위권 국가입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소득이 높으면 당연히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으면 범죄가 줄어들고 복지도 좋아지고 사회가 부드러워지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일본, 싱가포르는 소득에 비해 행복도가 낮고 남미 국가들은 소득에 비해 행복도가 높게 나타납니다.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죠. 반면 대부분 국가는 소득 수준과 행복도가 비슷합니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는 유교 전통을 가진 데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남과 비교를 많이 한다는 점, 그리고 물질 추구 경향이 강하다는 점 등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밝혀낼 만한 연구는 안돼 있습니다. 왜 한국은 불행할까, 왜 한국인은 돈만 벌면 행복할 줄 알고 죽기살기로 돈을 벌었는데 불행한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밝혀나가야 하겠죠.”
윤 위원장에 따르면 이번 연구 프로젝트에서는 한국인의 불행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원인도 밝혀냈다. 한국에서는 개인의 자유 혹은 선택의 자유가 매우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면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다거나 한번 실패하면 갈 곳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것 등이다. 이른바 ‘패자 부활전’이 어려운 사회적 환경이 한국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개인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게 윤 위원장의 견해다.
윤 위원장은 이번 연구 보고서 내용과는 별개로 한국인이 불행한 이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밝혔다.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민족적, 문화적 전통도 중요한 원인인 듯하다”는 것이다.
우선 한국인은 성취욕구가 굉장히 강한 유전자를 가진 데다 자기를 드러내기 좋아하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향을 지녔다는 점이다. 또 전통적인 가치가 퇴색하면서 돈을 최고로 치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나라가 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욕망은 크지만 그것을 모두 채울 수 없는 현실, 그리고 물질 추구에서 오는 정신적 황폐화가 불행의 씨앗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나아가 사회가 서구화되고 전통문화도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유교적 도덕관념이 혼재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이중적 삶’도 한국인을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라는 게 윤 위원장의 분석이다.
한국형 행복국가 소위원회의 제언
한국형 행복국가 소위원회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보고서를 통해 경제, 노동, 교육, 복지 영역에서 국민 행복 증진을 위한 9가지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노동의 유연·안정성 모델 정착 ▲기술창업 활성화와 규제 완화 ▲일·가족 양립을 위한 남성 출산휴가 ▲개인의 가치 추구에 대한 자유 ▲평등 교육 중심의 교육 개혁 ▲교육 분권화 ▲조세 개혁을 통한 보장성과 재분배성 강화 ▲지역과 현장 중심의 사회 서비스 분권화 ▲지속 가능성을 위한 사회적 합의와 대화 등이다.
특히 국민 행복 정책의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구현을 위한 전담 기구 설치에 대한 필요성도 제안해 눈길을 끈다. 실제 몇몇 국가에서는 국민 행복을 위한 전담 기구를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영국의 웰빙센터, 핀란드의 사회건강부, 아랍에미리트의 행복부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윤 위원장이 말한다. “국민 행복만 전적으로 다루는 공무원과 기구가 있어야만 우리가 소득은 계속 올라가는데 왜 불행한지에 대한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까지는 ‘GDP만 올라가면 된다’는 식으로 달려 왔으니까, 이제 국민 행복 전담 기구가 필요할 때도 됐다는 겁니다. 행복은 개인적, 유전적 이유가 크게 작용하기는 하지만 상당 부분은 환경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 행복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이 생각보다는 많이 있습니다.”
윤 위원장은 한평생 학자로 살아왔다. 행정학, 경제학, 경영학, 회계학을 섭렵할 만큼 다방면의 학문을 연구해왔다. 심지어 그는 불교학 박사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학문적 엄밀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 긴장의 끈을 좀체 놓을 수 없다. 윤 위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나이가 들면서, 특히 40대 후반에 입문한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으면서 적잖이 달라졌다고 한다.
“내가 덜 진지할수록 행복해진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스스로 좀 더 자유롭고 쾌활할수록 행복해지는 거죠. 제가 젊을 때는 엄청 진지하고 심각했어요. 학자라는 직업은 행복해지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해요(웃음). 행복해지려면 너무 심각하면 안돼요. 너무 성취지향적이고 엄격하고 진지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자유롭고 실수해도 되고 남의 눈치 덜 봐도 되고 약간은 제멋대로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 사회가 돼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얼마 전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은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우리가 어떤 생각과 태도, 생존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뽑은 최고의 강의에 주는 ‘석탑강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윤 위원장은 특유의 쉽고 친절한 설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법
윤 위원장이 책의 집필 배경에 대해 말한다. “가뜩이나 행복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이 4차 산업혁명 물결이 닥치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을 알려주고 싶어 책을 쓰게 됐습니다. 젊은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세대에 관계없이 모두 읽을 만한 책이라고 자부합니다.”
이 책에서 윤 위원장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바꿔나갈 세상의 모습을 쉽고 생생하게 서술하면서 우리의 현명한 대응 자세를 논하고 있다. 무서운 속도로 우리 삶 속에 들어서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낙관론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강조하는 반면 비관론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물론 언젠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윤 위원장은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는 쪽이다. 그는 어떤 미래가 올지는 ‘모른다’는 입장이다. 사실 과거에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여러 가지 미래 예측이 나왔지만 제대로 맞아떨어진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윤 위원장은 앞으로 개인들의 ‘학습 능력’과 ‘기본 역량’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어떤 시대가 와도 적응하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사는 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며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유연함과 함께 비판하고 질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윤 위원장은 인공지능과 로봇 시대가 와도 인간이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인간의 아름답고 건강한 몸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따라올 수 없는 인간만의 아날로그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또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양과 능력도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상당 기간 동안 앞설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이 가진 특유의 열정도 중요한 덕목이다. 열정이 있으면 인공지능 시대에도 적응할 길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행복해지려면 인간과 삶, 행복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멀리 내다보며 장기적인 목표를 지향하면서 순간순간의 상황에 잘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큰 방향과 목표를 잡되 급변하는 시대에 맞게 ‘바람 부는 대로, 낙엽 지는 대로’ 유연하고 신축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자는 것이다.
윤 위원장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개인적으로 어떤 것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낄까. 그의 대답이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인데, 부처님은 깨달음조차 추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씀을 접하고 저는 행복도 추구하려고 하면 얻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죠. 저는 행복이 어떤 부수적인 거라고 많이 느낍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혜롭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하고 평온하기도 할 때, 그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으면 지혜롭고 자유롭고 평온해지는 겁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