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세계적인 디자인 웹진 ‘디즌(dezeen)’에 한국인 디자이너 윤일섭씨의 의자가 실렸다. 주인공은 봄의 상큼함을 닮은 부드러운 노랑 빛깔의 ‘플리츠 체어(The pleats chair)’. 단연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플리츠 패턴이다.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팬츠를 연상케 하는 이 무늬는 일체형으로 이뤄진 등받이와 앉는 부분에 적용돼 곡선미와 경쾌함을 더한다. 한 가지 더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소재다. 윤일섭 디자이너는 “어떻게 하면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의자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플리츠 체어의 물성을 결정지었다”고 말했다. 알루미늄이라서 가볍고 알루미늄이어서 친환경적이며 디자인 핵심인 플리츠 패턴을 찍어내기 위해서 알루미늄이어야만 했다는 것.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늘 변화를 추구하는 디자이너 윤일섭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플리츠 패턴이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세이 미야케가 한 것처럼 플리츠 패턴을 의자에 말 그대로 찍어내셨다던데요.
네, 맞아요. 여느 의자 제작 과정처럼 재료를 길이에 맞게 자르고 잇고 붙이고 하는 복잡한 과정이 많이 생략되고, 단단한 틀로 알루미늄판을 찍어누르면 의자가 짠하고 만들어지는 방식을 선택했어요. 이렇게 말로 하면 그 과정은 단순한데 단순한 과정을 완성 시키기가 어려웠어요. 몰드를 제작하고 이용했는데, 알루미늄에서 선명한 패턴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많은 테스트를 했죠. 100kg이 넘는 몰드를 3D CNC 기계로 깎고 프레스로 누르는 작업을 반복했어요. 혼자 하기는 너무 벅차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요청하기 일쑤였죠. 워크샵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번씩은 도왔죠. 그래서 처음 프레스 기계에서 완벽하게 의자를 찍어냈을 때 박수가 쏟아졌어요.
- 친환경 소재라는 점에서 알루미늄을 염두에 두셨다고요.
디자이너에게 소재와 그 소재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디자이너는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직업이다’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디자이너에 의해 만들어진 제품이 한순간 사용되고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쓰레기가 되어버리니까요. 반박하고 싶은 부분은 너무 많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품이 사용될 때만큼이나 사용되고 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지속 가능한 소재에 대해서 많은 비중을 두게 된 이유에요. 알루미늄은 의자를 만들기에 튼튼할 뿐만 아니라 금속 중에서도 가장 높은 비율로 재활용되는 소재거든요. 또 무한정으로 재활용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알루미늄 제품을 재활용 금속으로 생산하면 1차 생산에서 요구되는 에너지의 90% 이상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팬츠에서도 이번 프로젝트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패션과 가구 디자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패션산업은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가장 트렌드에 민감합니다. 변화의 흐름에서 최전선에 서 있죠. 매년 패션, 가구, 리빙, 제품의 트렌드를 보게 되면 하나의 흐름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시작은 항상 패션이에요. 그래서 항상 패션과 건축 등 다른 분야의 디자인 트렌드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패션하면 단순하게 ‘예쁘게만 만들면 되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 내면은 심미적인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브랜드와 기능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를 적절한 밸런스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구도 마찬가지죠. 집안에 뒀을 때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려하 하고, 동시에 가구만의 아이텐티티도 지녀야 해요. 나아가 사람들의 동선 속에서 본연의 기능을 해야 하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가구는 그 제품의 주기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이죠. 계절이 바뀌어서 갈아입는 옷이 아니라 내가 결혼할 때 사서 내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 물려줄 수 있을 정도의 생애를 가져야 하니까요. 지속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디자인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고나 할까요.
-한국에서 디자이너 활동을 하다가 스웨덴의 ECAL에서 디자인 석사학위를 밟는 학생이 되셨어요.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거든요. 대학교 졸업 후 제품 디자이너로 폭풍 같은 3년을 보냈어요. 야근도 불사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중 언제 일할까 고민하며 지냈던 시간이었죠. 그 당시에는 디자인이 너무 즐겁고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제 모습이 너무 좋았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이 그러하듯 새로웠던 경험이 익숙한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말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무작정 유럽으로 디자인 여행을 떠났어요. 처음엔 3개월만 있으려 했는데 결국 1년 넘게 떠돌았죠.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좋은 인연들도 많이 만났고요. 덴마크에서는 운 좋게도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글로벌 건축, 산업 디자이너 팀인 감프라테시 듀오(Gamfratesi Duo)와 함께 작업했어요. 돌이켜보면 유럽에서의 삶을 꿈꾸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 그 새로운 시작에 걸맞은 출발지로 동경했던 디자인 학교, ECAL보다 더 좋은 곳은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ECAL에서 삼성의 세리프 TV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디자이너 부흘렉의 지도를 받으신다면서요.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디자인을 하면서 그 제품은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됐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부흘렉 형제는 산업디자이너에게는 유명한 디자이너지만 비전공자에게까지 알려지게 된데는 삼성 세리프 TV의 역할이 크죠. 그동안 (TV는) 얇고 선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세리프 TV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제품과 사람과의 관계를 주목했으니까요. TV가 벽에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움직이고 활동하는 공간 속으로 들어와 하나의 가구로 자리매김했죠. 이러한 부흘렉의 디자인 철학이 제게도 자연스레 녹아들었죠.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됩니다.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TV예요. 스펙과 기능보다 사람에 가까운 전자제품 디자인을 하길 늘 바래 왔습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앞서 이야기한 부흘렉의 디자인 철학처럼) 생활 공간에 녹아든 하나의 오브젝트로서의 TV를 만들어 보려 해요.
-마지막으로 꿈이랄까요. 어떤 디자이너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논리적인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 보다는 새로운 것에서 더 많은 흥미와 관심을 가져요. 그리고 그런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게 바로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래서 신선하고, 논리적이어서 설득될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의심하고, 안 좋다고 생각된 것도 정말 안 좋은 것인지 다시 고민해요. 물론 이 생각도 맞는지 계속 의심해 볼 것 같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10년, 20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새롭고 신선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제 꿈이겠죠.
/사진제공=윤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