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억원대 뇌물수수와 350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사진) 전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검찰이 법원에 제시한 증거에 모두 동의했다. 증인 대부분이 자신과 같이 일한 사람들인 만큼 자신의 포용력을 보여준 뒤 물증과 법리로 법정에서 다투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지난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정계선 부장판사)에 증거 인부서를 제출했다. 인부서란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인정하는지, 부인하는지에 대해 피고인 측 의견을 담은 서류다.
변호인단은 인부서에서 모든 증거에는 동의하나 (이에 대한) 입증 취지는 부인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증거는 인정하지만 이를 이 전 대통령 무죄를 입증하는 근거로 삼겠다는 의미다. 변호인단은 앞서 지난 3일 열린 이 전 대통령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검찰의 16개 혐의에 대한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한 바 있다.
이 전 대통령의 변호를 맡은 강훈 변호사는 “변호인은 통상처럼 증거 대부분을 부동의하자고 주장했지만 이 전 대통령이 반대했다”며 “이 전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금융자료나 청와대 출입기록등 객관적인 자료를 갖고 검찰 공소사실에 반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강 변호사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변호인단에게 “증인 대부분이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고, 검찰에 (그렇게) 진술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 사람들을 법정에 불러와 거짓말을 한 것 아니냐고 추궁을 하는 것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금도가 아닌 것 같다”며 “그런 모습을 국민들께 보여 드리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변호인단에게 “객관적인 물증과 법리로 싸워달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이 검찰 측 증거에 모두 동의하면서 재판 진행은 예상보다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전 대통령이 진술조서 등 검찰 증거에 부동의했다면 진술자들을 법정에서 증인으로 불러야 하는데 이 절차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특가법상 뇌물·조세포탈·횡령, 형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16개 혐의를 받는다. 이 전 대통령의 두 번째 준비기일은 오는 10일이며 본격적인 공판은 이달 23일께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