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선조의 붕당정치 다시보기!’ 편이 전파를 탄다.
“(선조가) 어렸을 적에 명종 공헌 대왕이 두 형과 함께 불러 어관을 벗어주며 차례로 써보라고 하였는데, 대왕에게 이르자 꿇어앉아 사양하기를 ‘임금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가 어찌 쓰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묻기를 ’임금과 아버지는 누가 중한가?‘ 하니, ’임금과 어버이는 비록 같지 않으나 충효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고 답하니, 공헌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선조 대왕 묘지문>
다른 형제들에 비해 영특했던 명종의 아들 하성군. 그가 바로 훗날 조선 제 14대왕 선조이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 초기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군주였는데. 백성의 아버지인 국왕이 백성을 버렸기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선조.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그는 무능력한 왕으로 묘사되는데. 우리는 이런 선조의 평가를 모두 믿어도 되는 것일까?
▲ 밥 잘 안 사주는 왕, 선조
조선시대 대표적인 조세제도였던 방납(防納). 왕실의 재정 충당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도리어 재정을 고갈시키는 폐단이 발생하고. 심지어 백성들의 삶까지 피폐해지는 상황까지 도달한다. 이에 선조는 특별 방책을 내세우는데. 바로 관리들에게 도시락을 직접 싸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 선조의 도시락 정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을까?
▲ 조선, 동(東)과 서(西)로 나뉘다
국가 재정 문제 등 여러 개혁과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신진 사림들은 서로의 생각 차이에 따라 자연스레 무리를 맺는다. 그들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불리며 서로를 견제하는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은 왜 탄생한 것일까?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선조의 반응은 어땠을까? 선조의 붕당정치 당시로 들어가 본다.
▲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것이 알고 싶다
선조 8년, 황해도 재령에서 종이 주인을 살인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수사 담당인 좌의정 박순은 사망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데. 이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갈등은 심화된다. 살인 사건 뒤에 감춰진 그들의 사정은 무엇일까?
[사진=KBS 제공]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