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송현동 경복궁 인근에는 3만7,141㎡(약 1만1,000평) 규모의 빈터가 철제 담벼락에 싸여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대한항공이 지난 2008년 이 송현동 부지를 삼성생명으로부터 2,900억원에 매입했지만 개발 계획을 내놓을 때마다 번번이 무산된 탓이다. 대한항공은 당초 7성급 호텔을 짓는 관광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당시 학교 인근에 호텔을 지을 수 없도록 규정한 학교보건법에 가로막혀 무산됐다. 이후 2015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문화융합센터 ‘K-익스피어리언스’를 짓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번에는 ‘최순실 사태’와 엮이면서 사업이 좌초됐다. 금싸라기 땅은 아직도 어떻게 활용할지 구체화되지 않았다.
관광·의료·빅데이터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은 제조업 부진을 대체해 내수를 키우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꼽히지만 한국에서는 규제와 기득권의 반발에 막혀 십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새로운 서비스가 나올 때마다 규제 ‘지뢰밭’을 건너야 한다는 조소 섞인 반응까지 나온다.
보험 업계는 최근 다양한 헬스케어 서비스를 내놓고 있지만 정부의 서비스 산업 규제 해소 작업이 더딘 탓에 경쟁력 있는 서비스 출시를 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화재의 경우 건강보험 가입 고객 정보를 ‘빅데이터’로 구축해 맞춤형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 도입을 검토했지만 규제로 인해 출시하지 못했다. 정부가 규제 개선 계획을 내놓기는 했다. 지난 2월 헬스케어 산업을 키우겠다며 올 1·4분기 안에 ‘의료행위 범위 판단을 위한 민관합동 법령해석 태스크포스(TF)’를 출범해 헬스케어 상품·서비스 출시 애로를 해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케어’ 시행으로 의료업계와 정부의 갈등이 커지면서 TF 출범도 예상보다 늦어졌고 논의 진척도 더디다. 그렇다 보니 보험사들은 건강관리 프로그램과 보험료 할인혜택을 연계하는 초보적인 헬스케어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우버, 중국은 디디추싱 등 승차 공유 서비스가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성장을 사실상 막아놓은 것 역시 정부 규제의 대표적인 사례다. 상황이 이렇지만 서비스산업발전법과 원격진료를 가능하게 하는 의료법, 빅데이터 활성화를 위한 개인정보보호법 등은 수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결과는 참담하다. 우리나라 서비스 산업의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45.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제수지상 서비스 수출은 877억2,060만달러로 1년 전보다 7.6%나 감소했다. OECD 35개 회원국 평균은 7.2% 증가였다. 서비스 수출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 국내에서 서비스 산업이 성장할 토양이 마련되지 않으니 생산성은 물론 해외시장에서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조업·수출 중심의 경제 활력이 저하되면서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한 내수 성장을 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혁신 성장의 관점에서 서비스 산업에 묶여 있는 규제를 과감히 풀어야 내수를 성장시킬 체력이 생긴다”며 “특히 고급 서비스업의 경우 형평 논리 때문에 정부의 제도 개선이 더딘 측면이 있는데 고급 일자리 창출 측면에서 보다 과감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이명박 정부부터 무려 16번의 대책을 내놨지만 매번 핵심은 빠져 있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이해관계자들의 눈치만 보다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매번 서비스 관련 대책은 재탕·삼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함께 서비스 산업 종합대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도입, 과실송금 허용 등 의료·교육 분야의 핵심과제 개선에는 미흡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7대 유망 서비스 산업을 선정해 현장 대기 프로젝트 지원과 규제개선 등을 추진했지만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은 여전히 통과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출범 이후 뒤늦게 지난 2월 서비스 연구개발(R&D) 추진 전략과 규제 개선 과제를 내놨지만 핵심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종의 진입 장벽 완화나 새롭게 나타나는 유형의 서비스에 대한 화끈한 규제 개선은 건드리지도 못하거나 지지부진하다. 정부 관계자는 “조그만 규제나 제도가 바뀔 때도 이해관계자 등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보니 화끈한 규제 개선책을 내놓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세종=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