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어슬렁어슬렁, 허우적허우적, 머뭇머뭇

허우적허우적선 고통 탈출의 몸부림

어슬렁어슬렁에선 삶의 여유 느껴

성격 설명하는 힘 지닌 의태어처럼

나는 삶을 탐험하고 매번 강해진다

작가




‘의미’로 말을 걸기보다는 ‘뉘앙스’로 말을 거는 단어들이 있다. 알록달록, 반짝반짝, 살금살금 같은 의태어들이 그렇다. 의태어는 마치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듯, 언어로 영화를 찍듯,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우리 마음속에 놀라운 동영상들을 만들어낸다. ‘팔딱팔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고, ‘꿈틀꿈틀’이라는 단어만 봐도 무언가가 맹렬하게 움직이는 이미지가 머릿속을 관통한다. 의태어들을 생각하면 자음과 모음의 간단한 조합만으로 경이로운 차이들을 빚어내는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에 가슴 설레곤 한다. 게다가 어떤 의태어들은 우리 자신의 성격을 설명해주는 힘을 지녔다. 몸짓이 재바르고 날쌘 사람에게는 ‘사뿐사뿐’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리고,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탐색해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기웃기웃’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린다. 나에게 어울리는 의태어는 뭘까. 나는 ‘어슬렁어슬렁’ 삶을 탐색해보기를 좋아하고, ‘허우적허우적’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대기를 밥 먹듯 하고, ‘머뭇머뭇’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도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런 나를 예전에는 참 싫어했지만, 언제부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애틋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누가 ‘어슬렁어슬렁’ ‘허우적허우적’ ‘머뭇머뭇’ 이런 의태어들은 당신의 성격을 설명하기엔 너무 부정적인 단어들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온몸으로 저항하며 ‘아, 이 단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의태어인데요’라고 변호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일지라도,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단어들이 바로 그런 의태어들이다.


나는 내 트레이드마크 같은 이 아름다운 의태어들을 이렇게 변호하고 싶다. ‘어슬렁어슬렁’은 결코 게으른 사람의 천하태평의 몸짓이 아니에요. ‘허우적허우적’은 결코 불쌍하고 가여운 몸부림이 아니에요. ‘머뭇머뭇’은 결코 용기 없는 자의 어설픈 망설임이 아니에요. 어슬렁어슬렁, 그건 삶이 펼쳐 보이는 뜻밖의 다양성에 언제든 온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의 눈부신 여유랍니다. 허우적허우적, 그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모든 용감한 사람들의 친구 같은 단어랍니다. 머뭇머뭇, 그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의태어예요. 저는 한 번도 사랑 앞에서 돌진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뿐 아니라 좋아하는 모든 것들 앞에서는 항상 망설였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망설임이 단지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간절함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 머뭇머뭇, 망설입니다. 지금 이 문장을 쓸 때조차도. 그게 저랍니다. 어슬렁어슬렁, 허우적허우적, 머뭇머뭇, 그 세 가지 단어의 조합은 마치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저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정체성의 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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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슬렁어슬렁, 허우적허우적, 그리고 머뭇머뭇. 나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벗어날 수 있는 낙인 같은 의태어들이고, 나를 키운 팔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정해진 경계 속으로 깔끔하게 쏙 들어가는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수업보다는 먼산바라기를 좋아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어딘가 멀고 아스라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목적의식적인 모든 행동에 쑥스러움을 느꼈다. 조직생활의 적응에는 매우 힘든 성격이지만,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되자 그 모든 서성거림, 머뭇거림이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어슬렁어슬렁’은 삶의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해지는 몸짓이다. 너무 급하게 돌진하지 않고, 목적 없이도 얼마든지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해지는 여행자와 산책자의 몸짓이다. ‘허우적허우적’은 원고마감이 올 때마다, 어려운 강의 앞에서 긴장감에 부들부들 떨 때마다, 내가 두려움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일상적인 몸짓이다. ‘머뭇머뭇’은 곧바로 본론을 말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망설임의 표현이다. 전할 메시지가 있긴 한데, 자꾸만 뒤로 숨고 싶은 마음, 잘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꾸만 자기 안의 요새로 숨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견뎌본 사람들은 결국 강해진다. 느리지만 오래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곧바로 직구를 던질 수 없지만 언젠가는 최고 속력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의 오랜 참음과 견딤을 안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허우적허우적, 머뭇머뭇, 삶을 탐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때마다 매번 더 강해지고, 깊어지고, 용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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