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 단축이라는 국정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그동안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왔던 정부가 이처럼 숨고르기에 나선 배경에는 ‘제발 좀 살려달라’는 기업들의 읍소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300인 이상 중소·중견기업 등은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과 가진 업종·지역별 간담회·설명회에서 근로시간 단축을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시행을 일정 기간 유예하거나 계도기간을 부여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지난 18일 계도기간 설정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다.
정부의 이번 조치로 300인 이상 중소·중견기업 등은 어느 정도 준비 시간을 벌 수 있게 됐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오는 12월 31일 사업장의 근로시간 단축 위반을 적발한 근로감독관이 해당 사업주에 6개월 간의 시정기간을 부여하면 이론적으로 해당 사업장은 2019년 6월30일까지 주당 52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줄이면 된다. 7월 1일에 당장 적발되더라도 시정기간 6개월을 적용하면 사업주는 연내에만 주당 52시간의 근로시간을 준수하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업들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정부가 시정기간을 일률적으로 6개월로 못 박지 않아 근로감독관의 재량에 따라 단 3개월의 시정기간이 부여될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근로감독관에게 근로감독 또는 진정 등의 처리 과정에서 근로시간 위반을 확인하더라도 교대제 개편, 인력 충원 등 장시간 근로 원인 해소를 위한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는 최장 6개월의 시정기간을 주도록 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노동시간 위반에 관한 시정지시는 전적으로 근로감독관의 권한”이라며 “근로감독관의 판단에 따라 시정기간은 기업별로 달라질 수 있다. 상황을 봐서 6개월 주란 얘기지 전부 6개월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이번 조치와 관련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의 구조적인 문제에 시정기간 확대 부여라는 임시방편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사업장·업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주 52시간 근로를 강제하는 것은 고질적인 고용시장 이중구조를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는 근로시간 단축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반면 중소·중견기업 비정규직 근로자는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삼성그룹 등 대기업은 이미 지난해부터 주 52시간 근로를 시범적으로 운용하면서 신규 인력 충원도 진행했다. 하지만 대다수 중소 제조업체나 영세 경비·청소업체 등은 여력이 없어 기존 인력으로 근로시간 단축에 대처해야 할 처지다. 고용부 실태 조사에서 300인 이상 기업 3,700곳 중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인력 충원 계획을 세운 기업의 비율은 21.8%에 불과했다. 노무 컨설팅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근로시간 단축은 대다수 근로자들의 급여 감소, 근로여건 악화 등을 불러올 가능성도 높다”고 지적했다. /임지훈·이종혁기자 jhl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