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의 정치인’이라는 별칭만큼이나 파란만장했던 고(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인생은 굴곡진 영욕의 정치사 그 자체였다. 5·16쿠데타로 군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다가도 끊임없는 견제 속에 정치적 유랑을 반복해야 했다. 두 번의 국무총리와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3김(金)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대권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영원한 2인자’라는 수식어는 늘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동시에 많은 시련에도 끈질긴 정치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역시 그가 2인자로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지난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JP는 서울대 2학년 재학 시절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가세가 기울자 교사의 꿈을 접고 1949년 육사에 입학했다. 1960년 중령이던 그는 육사 8기 동기생들과 함께 3·15부정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 등의 퇴진을 주장하는 정군운동을 일으켰다가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1년 JP는 처삼촌인 당시 박정희 소장과 함께 일으킨 5·16쿠데타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 초대 수장에 오른 JP는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 간 권력다툼 속에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첫 번째 외유길에 오른 그는 6대 총선에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했지만 1964년 ‘한일 굴욕외교’ 파동으로 또다시 외유로 내몰렸다. 이후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지만 대권을 노리고 전국적인 사조직을 만들었다는 ‘농민복지회 사건’으로 1968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71년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무총리에 올라 4년 반 동안 총리로 재임하며 ‘박정희 후계자’의 꿈을 키우던 그는 1979년 10·26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신군부가 집권하자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서 재기를 모색했다. 1986년 귀국한 JP는 서슬 퍼런 5공 정권의 감시 속에 옛 공화당 세력을 몰래 규합해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3김과 함께 출마한 13대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을 중심으로 35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JP의 정치적 변신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1990년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반전을 꾀한 그는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도와 여당 대표까지 올랐지만 당내 계파 갈등에 다시 발목을 잡혔다. 1995년 여당이던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JP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50석의 원내 3당으로 입지를 굳혔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1997년 대선 도전에 나섰지만 ‘DJP 연합’의 야권 단일화로 전략을 수정하며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자신의 오랜 라이벌이던 YS와 DJ를 연거푸 대통령으로 만들며 ‘킹메이커’이자 ‘2인자’의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그러나 DJ와의 동거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JP는 김대중 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오르며 DJP 공동정권의 창업주임을 과시했지만 2001년 DJP 연대가 깨지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이끈 자민련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4석의 미니 정당으로 전락했고 비례대표 1번이던 본인 역시 낙선하며 10선의 꿈도 날려보냈다. 결국 JP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는 말을 남긴 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정치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런 그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한국 산업화를 이끈 안목 있는 정치인이자,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한 킹메이커”라는 평가와 “3당 합당으로 대한민국 정치를 후퇴시키고 지역주의를 선동해 권력을 연장한 처세의 달인”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