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 이미 보름이 지났지만 자꾸만 곱씹게 된다. TV 드라마를 열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장면에서 화면이 멈추고 ‘다음 이 시간에’라는 안내 문구가 떴을 때와 기분이 비슷해서다. 비핵화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앞으로 어떤 진전을 보일까. 종전선언은 어떻게 되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정확하게 알 길이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드라마의 다음 회차에서 벌어질 일을 추측해보기 위해 지난 회차를 다시보기 하듯이 북미 정상회담도 다시 짚어본다. 그러다 보면 개인적으로 눈에 깊숙이 들어오는 장면이 하나 있다. 모두가 역사적이라고 평가하는 북미 두 정상의 악수 장면이 아니다. 회담 전날 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깜짝 야간 외출을 감행하는 지점이다. 그가 호텔을 나설 때만 해도 경호는 대단히 삼엄했다. 북한 자체 경호부대는 물론 싱가포르 무장 경찰, 군인까지 이중 삼중으로 경호가 이뤄졌다. ‘최고 존엄’으로 불리는 폐쇄 국가 북한 지도자가 움직이는 현장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호텔 밖으로 나가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김 위원장이 마리나베이샌즈호텔 루프톱 수영장에 등장하자 “헤이,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김 위원장은 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반쯤 벗은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휴대폰 카메라로 김 위원장을 마구 찍어대는 장면을 북한 사람들은 과연 상상이나 해봤을까. 김 위원장이 ‘은둔’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어내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긴 비핵화 내용을 놓고 부실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는 했지만 북한의 향후 행보가 그래도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쉽게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장면에 있다. 북미 정상회담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김 위원장이 밖으로 너무 멀리 나왔다. 40년 전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 개혁·개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북한 내부의 절박감도 크다.
물론 대북 관계에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는 속담은 명언이다. 하지만 의심과 경계만 하고 있기에는 북한의 시곗바늘이 요즘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한국을 제외하고 북한과 가장 근거리에 있는 중국과 일본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찬 채 북한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국 사업가들은 북한으로 가는 열차에 타기 위해 암표까지 구한다고 한다. 일본은 아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북한에 돈을 쓸 곳으로 직접 지목한 국가다.
북한은 그간 늘 남북 관계에 ‘우리 민족끼리’를 핵심 원칙으로 내세워왔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의 흐름을 생각하면 향후 북한이 경제 개혁·개방에서도 이 원칙을 우선순위에 둘지는 의문이다. 우리야말로 단순한 밑그림을 그릴 것이 아니라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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