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녀’의 닥터 백은 전형적인 악역의 모습을 띄고 있다. 거칠게 뻗쳐있는 짧은 머리와 검은 피부, 날카로운 목소리까지. 등장만으로 서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행동과 대사 하나하나에 캐릭터만의 색깔이 묻어있다. 모든 장면을 연기하며 ‘닥터 백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배우 조민수의 고민이 독창적인 악역을 탄생시켰다.
극중 뇌과학자인 닥터백은 자윤(김다미)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박훈정 감독은 원래 남성으로 설정했던 닥터 백을 여성 캐릭터 바꿨고 적임자로 조민수를 택했다. 조민수는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선뜻 시나리오를 건넨 박훈정 감독에게 깊은 감동을 느꼈다.
“‘마녀’의 작업이 행복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박훈정 감독이 남자로 그려놓은 캐릭터에 나를 넣었다는 부분이었다. 작가로서 본인이 그린 그림이 있을 텐데 나를 그 자리에 넣겠다고 생각하니 배우로서 고맙고 뿌듯했다.”
고마움에는 작품을 향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으로 답했다. 연기 경력만 30년이 넘은 베테랑 배우이지만 조민수의 연기에 ‘그냥’은 없다. 닥터 백의 눈빛과 표정, 손짓 하나하나에 이유와 사연을 담으며 관객들이 인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닥터 백이 어느 영화에나 한명 쯤 있을 악역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다.
“하나하나 쪼개서 캐릭터를 만들었다. 닥터 백이 초능력자였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관객들이 용서를 한다. 그런데 사람이니까 어떻게 최대한 (현실과) 밀착되게 그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닥터 백의 과거, 가족 구성, 사람을 대하는 태도, 표현 방법 등을 하나하나 설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했다. 끊임없이 들어가다 보면 행동이 좁혀지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없으면 갑자기 다른 인물이 나올 수가 있다. 이런 작업이 고통스럽지만 행복하기도 하다.”
캐릭터의 세세한 설정이 영화에 그대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마녀’는 주인공 자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했다. 닥터 백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이유, 그와 관련된 결말에 대해서도 해석이 부족하다. 조민수 역시 이에 공감하며 영화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닥터 백의 숨겨진 이야기를 전했다.
“원래 미국 국회 신이 영화의 첫 신이었다. 각 나라에서 (인간의 뇌를 조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미 의회에서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철수를 명령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제거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닥터 백은 본인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아까워한다. 이런 장면이 없어지면서 조금 덜 친절하게 시작됐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 때) 불친절한 면이 있다. 그런데 관객들이 (영화의 설정을) 전부 들여다볼 수는 없다. 좀 더 친절하면 뒷부분을 보기가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어떻게 보여줘야겠다는 정확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며 감독의 생각과 의도를 끝까지 존중했다. 특히 그는 신인과 기성배우들의 간극을 좁히며 현장을 이끌어간 박훈정 감독의 능력을 높이 샀다. 김다미를 비롯해 고민시, 정다은 등 신인 여배우들이 특히나 많았던 현장은 선배인 조민수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현장에 기성배우가 거의 없었다. 여자 배우 셋이 다 신인이다. 대본 연습을 하러 갔는데 신인 셋이 앉아있어서 놀랐다. 그때부터 어깨가 무거워졌다. 박휘순도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다. 신인배우와 기성배우들은 에너지를 쓰는 파장이 달라서 균형이 안 맞을 수 있다. 신인이 한 명이면 여기저기서 도와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감독님이 이 셋을 어떻게 끌고 갈지 걱정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균형을 조절해주면서 잘 만들어줬다.”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을 걱정하는 모습에서는 대선배의 분위기가 풍겼지만, 연기 인생 처음으로 총을 맞는 신을 앞둔 순간에는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극중 다리에 총을 맞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연기를 보였던 그는 “한 번에 오케이가 났다”며 해맑은 표정으로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총을 맞는 연기를 하는건 처음이었다. 한 번 장비를 차고 분장을 하는 데 30분이 걸리는데 시간이 지연되니까 앞에서 후배들이 많이 혼났다. 그걸 보는데 ‘내가 이 나이에 욕먹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너무 떨려서 분장 해주는 사람한테도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다. 그냥 나한테 오는 대로 받아들이자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는데 한 번에 오케이가 났다. 이후에 현장에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나 총 맞았어. 한 번에 갔어’ 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의 자랑에서는 새로운 캐릭터를 향한 그동안의 갈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남배우들에게는 일상처럼 흔한 총 맞는 연기를 30여 년 만에 할 수 있었다는 것. 이는 곧 한국 영화계에서 조민수를 비롯한 여배우들이 갖고 있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박희순과 최우식이 ‘총 안 맞아 봤어요?’라고 묻더라. 여배우들 중에 총을 맞아 본 배우들은 거의 없을 거다. 남배우들은 작품에서 총 맞는 일이 다반사인데 여배우는 그렇지 않다. 다른 여배우들도 총을 맞는 연기를 보여줄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