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상사맨
대우서 車·섬유 수출 전세계 누벼
그리스 지사장·개인사업까지 승승장구
부친 타계 후 ‘도자기 가업’ 이어
“도자기가 유명한 나라들은 모두 과거에 한 번은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이었기 때문에 음식이 세계적으로 유명했는데 음식이 유명해지면서 도자기도 덩달아 유명해진 거죠. 우리 도자기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 음식을 먼저 수출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지난 1988년 광주요를 승계한 뒤 화요와 가온 등을 설립하며 현재의 광주요그룹을 만든 한 조태권(70·사진) 광주요그룹 회장은 “도자기가 발달한 국가의 공통점은 궁중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발달했고 그 덕분에 궁중음식과 그를 담는 도자기, 함께 마시는 술도 널리 퍼졌다는 것”이라며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의 근원이 음식인 만큼 우리 도자기를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음식과 우리 술이 필수라고 생각해 화요와 가온을 설립했다”고 밝혔다.
광주요는 1963년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조 회장의 부친 조소수 선생이 현지에서 사용되는 도자기의 높은 수준에 감탄해 직접 설립한 회사다. 당시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과거 조선 도공들에 의해 수준을 높여온 반면 국내 도자기는 조선시대부터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는 백자를 공급하던 주 생산지였으나 1883년 일본에 의해 문을 닫은 ‘광주 분원’의 이름을 따 사명을 광주요라 지었다. 조선 왕실에 진상하는 도자기를 굽던 관요(官窯)의 유서 깊은 전통과 장인정신을 이어받기 위함이었다.
경기도 광주에 가마를 세운 조 선생은 전국의 장인들을 경기도 이천에 집합시켰고 청자와 분청의 전통을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초기 설립정신은 현재도 계속돼 재료·수비·성형·정형·조각 등 도자 제작의 각 공정마다 2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장인들이 책임지고 있다. 이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광주요 도기는 현재 청와대 관저와 영빈관을 비롯해 롯데호텔과 신라호텔·조선호텔 등 국내 최고급 호텔 등의 VIP용 식기로 사용되고 있다.
조 선생이 광주요를 설립하고 키워나가던 때에도 조 회장은 회사와 거리가 멀었다. 당시 대우에서 근무하던 조 회장은 섬유와 자동차 수출 등을 담당하며 100여개국을 다니는 등 전 세계를 누볐다. 이후에는 특수물자부의 그리스 지사장을 맡았고 개인 사업까지 크게 벌이며 승승장구했다. 1988년 부친의 타계 이후 모친의 권유로 광주요에 들어온 조 회장은 “도자기만큼은 명맥을 유지해야 한다는 어머님의 말씀과 6남매의 막내로서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도자기에 발을 들이게 됐다”고 회상했다.
대우에서 오래 근무한데다 개인 사업까지 성공적으로 해낸 조 회장이었지만 도자기 사업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대표직을 맡으며 설립한 공장은 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회사를 운영하던 모친마저 1992년에 타계하면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조 회장은 본격적인 도자기 공부에 몰두하며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그는 “3년간 도자기와 모든 역사 등을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모든 문화는 음식에서 창조된다는 것”이었다며 “역사가 음식을 통해 발전하고 문화를 만들어온 과정을 보면서 음식의 가치를 만들어야 고급 문화가 생기고 곧 고급 도자기에 대한 수요도 생기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고급한식 전도사
한식 ‘가온’, 명품식기 ‘광주요’가 품고
와인·보드카에 견줄 술 ‘화요’ 더해 화룡점정
‘한식은 저렴한 음식’ 고정관념 버리고 세계화 앞장
한식의 가치를 높이겠다고 결정했지만 여건은 녹록하지 않았다. 아무리 값비싸고 좋은 재료를 넣더라도 된장찌개와 같은 한식은 무조건 몇 천 원에 불과한 음식이라는 편견이 사람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아무리 비싸게 음식을 만들어도 국내에서는 인정해주지 않아 결국 세계 시장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다만 세계 시장에 가지고 나갈 음식과 도자기는 있지만 좋은 술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2000년 화요를 설립했다”고 말했다. 그는 화요가 세계의 술과 경쟁할 수 있도록 와인이나 사케와 비슷한 도수의 17도, 보드카와 비슷한 도수의 41도 등 다섯 가지 종류를 내놓았다.
음식과 도자기·술을 모두 갖추며 세계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마친 그는 2007년 미국 나파밸리에서 10곳의 와이너리 오너를 초청해 고급 한식을 선보이는 행사를 열었다. 조 회장은 “우리의 음식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생각에 시작한 행사였는데 참가자들이 탄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한식의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수준을 먼저 높인 뒤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한식에 감동하고 이것이 세계에 알려져 마침내 세계인의 보편적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인 만큼 이 같은 행사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일식을 예로 들었다. 일식의 경우 미국의 최고급 호텔에 식당을 내는 등 철저하게 고급 브랜드 전략을 취했고 이후에 고급 식당과 중급 식당 등을 차례로 열어 상류층을 모방하고자 하는 중산층과 서민들까지 끌어들였다는 설명이다.
조 회장은 “일본은 1964년에 2000년까지 일식 인구를 10억명으로 만들고 2000년에는 오는 2020년까지 20억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는데 이미 이 목표를 달성했다”고 지적했다. 한식을 무작정 해외의 대중에게 알리기보다는 ‘고급 한식’을 먼저 알려 한식이 상류층이 선호하는 음식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면 자연스럽게 일반인들도 한식을 흠모하게 돼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조 회장은 한식의 세계화가 전통 도자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며 광주요의 성장세가 두드러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음식이 가치가 있어야 이를 담는 도자기의 가치도 함께 오르는 것”이라며 “식자재가 다양해지고 고급 음식문화가 생기면 고급 도자기에 대한 수요도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식 세계화라는 길을 남들보다 먼저 개척한 탓에 힘든 시기를 보냈던 조 회장은 더 큰 꿈을 그리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는 선례를 만들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앞으로는 이만큼 만들어진 술과 음식의 가치를 가지고 기업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나라의 전통을 담은 술 본부와 양조 본부는 물론 이 밖에 세계화할 수 있는 은 식기 등을 연구하는 음식연구원을 만들고 옛날 것을 재현하고 발전시키는 큰 연구소를 만들어 산업화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태권 대표는…
△1948년 부산 △1973년 미국 미주리주립대 공업경영학과 △1973~1974년 도쿄 마루이치상사 △1974~1982년 대우 △1988년~ 광주요 대표이사 △2003년 화요 설립 △2008~2009년 ‘2010-2012 한국 방문의 해’ 추진위원회 이사 △2009~2010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자문위원 △2012년 문화관광부 한류문화진흥자문위원회 자문위원 △2009년~ 성북문화원 원장 △2012년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 무형유산 자문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