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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분칠의 광대로 나타난 리차드 3세...정중동 사회 흔드는 혁명가?

2인 광대극 재해석 '리차드 3세' 연출 장 랑베르 빌드·로랑조 말라게라

"권력에 대한 성찰...이 시대가 리차드 3세 찾는 이유죠"

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




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


하얀 분칠을 한 얼굴에, 잠옷을 입고 주름 장식을 목에 건 광대가 무대 한가운데 거꾸로 매달렸다. 벼랑 끝에 내몰린 그가 내뱉는 한 마디. “말을 다오. 내게 말을 다오. 말을 주면 내 왕국도 주리라.”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매력적인 악인 ‘리차드 3세’가 최후의 순간 내뱉는, 가장 유명한 대사다. 왕위 찬탈을 위해 형과 조카들마저 서슴없이 죽였던 리차드 3세는 등이 굽지도, 얼굴이 일그러지지도 않았다. 10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황정민의 복귀작(2월), 유럽 연극의 미래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의 내한 공연(6월)에 이어 올해 국내 무대에 오른 세 번째 리차드 3세이자, 마지막 리차드 3세는 이렇게 관객들의 상상 너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


국립극단이 해외 교류 프로그램으로 지난 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선보인 ‘리차드 3세’는 2인극으로 구성된 광대극으로 연출가 겸 배우 장 랑베르-빌드가 자신을 리차드 3세라고 굳게 믿고 있는 광대로 등장해 극을 이끈다. 원전 그대로 몸이 비틀린 리차드 3세를 무대 위에 세워 신체적 콤플렉스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신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모습으로 등장, 잔혹한 권력 쟁탈전을 유희로 풀어내며 관객들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고전을 비트는 과감한 시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할 터. 이에 대해 공연 직후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공동 연출가인 로랑조 말라게라는 “그의 모호하고 광기 어린 행동을 정당화하고 관객들에게 동정심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초점을 뒀다”며 “배우가 캐릭터의 몸속으로 들어가 연기하는 사람이라면 광대는 인물을 재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국립극단이 해외교류활성화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리차드 3세’ /사진제공=국립극단


보통의 연출가들이 리차드 3세를 반영웅적 인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오히려 리차드 3세의 무정부주의적 면모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랑베르-빌드는 “리차드 3세의 조력자인 버킹엄공부터 형수인 엘리자베스 역시 비열한 인간들이지만 우리는 리차드 3세를 향해서만 손가락질한다”며 “오히려 리차드 3세는 그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마치 공고한 질서에 갇힌 것처럼 정중동인 세상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혁명가이자 영웅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연 중 관객들은 리차드 3세의 명에 따라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고 대관식 이후 반대 세력을 처단하는 과정에선 함께 무대에 올라 공던지기로 인형을 쓰러트리며 묘한 쾌감을 맛본다. 선왕의 충신인 헤이스팅스 경을 처형하는 장면에서는 공기 펌프로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터뜨리는데 관객들은 웃고 환호하는 사이 잔혹한 살육극의 한가운데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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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3세’의 주연배우 겸 연출가인 장 랑베르-빌드(Jean Lambert-wild·왼쪽) 떼아뜨르 드 뤼니옹-리무쟁 국립연극센터 예술감독과 공동 연출가인 로랑조 말라게라(Lorenzo Malaguerra)가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송은석기자‘리차드 3세’의 주연배우 겸 연출가인 장 랑베르-빌드(Jean Lambert-wild·왼쪽) 떼아뜨르 드 뤼니옹-리무쟁 국립연극센터 예술감독과 공동 연출가인 로랑조 말라게라(Lorenzo Malaguerra)가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송은석기자


화려한 아트 서커스장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무대는 시시각각 변하며 그 자체로 이야기를 완성하는 핵심 역할을 하는데 이를 두고 랑베르-빌드는 ‘연기하는 무대’ ‘생각하는 기계’라고 소개했다. 리치먼드 백작과의 전투 중 리차드 3세가 입은 도자기 갑옷도 예사롭지 않다. 랑베르-빌드와 말라게라가 주로 활동하는 프랑스 리모주의 자기 장인이 1년간 작업한 예술작품으로 깨질 듯 위태로운 권력을 상징한다. 최후의 순간 거꾸로 매달린 리차드 뒤로 펼쳐지는 영상은 실제 리차드 3세의 안장 작업을 랑베르-빌드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그는 “무대 디자인과 기술은 연극의 시적인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의 무대는 극의 이해는 물론 감정 몰입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소개했다.

‘리차드 3세’의 주연배우 겸 연출가인 장 랑베르-빌드(Jean Lambert-wild·오른쪽) 떼아뜨르 드 뤼니옹-리무쟁 국립연극센터 예술감독과 공동 연출가인 로랑조 말라게라(Lorenzo Malaguerra)가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송은석기자‘리차드 3세’의 주연배우 겸 연출가인 장 랑베르-빌드(Jean Lambert-wild·오른쪽) 떼아뜨르 드 뤼니옹-리무쟁 국립연극센터 예술감독과 공동 연출가인 로랑조 말라게라(Lorenzo Malaguerra)가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송은석기자


아날로그의 미학을 구현한 무대 같지만 다양한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리차드 3세 주변을 떠도는 망령을 표현할 때는 안면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로 풍선이나 무대 빈 공간에 애니메이션을 투사해 판타지를 완성한다. 40여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을 2인극으로 풀어낸 비결도 여기 있다.

올 한해 숱하게 리차드 3세가 국내 무대에 소환된 이유로 랑베르-빌드와 말라게라는 촛불 혁명을 꼽는다. 말라게라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거나 정부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 민주주의 시스템이 구멍이 생긴 나라에선 리차드 3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권력이 얼마나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한 사회에 성찰의 기회를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혁명이란 완성되는 법이 없다. 우리가 끊임없이 리차드 3세를 찾는 이유다.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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