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경제 허무주의’를 경계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급격한 고용시장 변화에 혼란 커져

산업계 무력감과 좌절은 위험수위

소통·설득으로 구조적 문제 풀고

경제도 유리그릇 만지듯 신중해야




글로벌 금융위가 한창이던 지난 2008년 말 런던정경대를 찾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교수들에게 뜻밖의 질문을 하나 던졌다. 똑똑하다는 경제학계가 왜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비극적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여왕에게 혼쭐이 난 학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원인 분석에 들어간 끝에 경제주체들의 심리적 측면을 주요 요인으로 제시했다. 경제 상황이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에 휩싸여 낙관론이 팽배했고 불리한 실상을 애써 외면하는 바람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흔히 경제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가 없다고 말한다.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저마다 의지와 판단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심리나 전망은 곧바로 경제지표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글로벌 무역전쟁에다 금리 인상과 환율 등 금융시장 불안이 덮쳐오지만 마땅히 손 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서울경제신문이 현대경제연구원과 공동으로 주요 기업 100개사를 대상으로 하반기 경영전망을 조사했더니 절반 이상의 기업이 수익성 향상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응답했다. 말이 좋아 수익성이지 사실상 숨만 쉬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지인들에게서는 다급한 나머지 거리에 나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매출이 부쩍 줄어들었지만 예전처럼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고용하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임대료나 공과금을 제외하면 그나마 통제 가능한 분야가 인건비였는데 이마저 능력 범위를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가계소득의 핵심계층인 자영업자들이 우군을 확보하기는커녕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셈이다. 청년들 역시 치솟는 실업률 때문에 구직활동을 포기하고 경제활동마저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든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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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으로 대변되는 소득주도성장은 기존의 정부에서 추진해온 낙수효과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다.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없앴더니 기업 금고만 채워졌을 뿐 서민들의 삶은 오히려 피폐해졌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서민의 주머니부터 채워 소비를 늘리고 투자 확대로 이끌어나가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것 자체가 결국 임금근로자에 대한 보상일 뿐 자영업자나 영세기업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주 52시간 근무제 역시 대기업 종사자처럼 일부 계층에 혜택이 몰릴 수밖에 없다. 일반 중소기업 근로자나 사회 취약계층이 떠안게 될 상대적 박탈감이나 무력감은 새로운 갈등과 분열을 낳을 수 있다.

수십 년간 지속돼온 경제구조를 바꾸자면 혼선과 부작용은 어느 정도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수혜계층이 따로 있고 누군가는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는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경제주체들이 급격한 변화에 불안해한다면 소통과 설득으로 이해를 구해야 마땅한데도 ‘정권 흔들기’로 몰아붙인다면 경제가 정책효과대로 살아나기는 힘든 법이다. 정부와 여당은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민생경제를 챙기겠다며 나름 분주한 모습이다. 여당에서는 민생평화상황실까지 꾸리고 나섰다. 하지만 여권은 국민들이 왜 집권당의 움직임에서 진정성이나 절박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한국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간신히 정치 허무주의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주체들이 규제와 통제에 묶여 경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할 판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엊그제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에게 하반기에는 기업 현장 방문을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기업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애로를 듣고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정책 여하에 따라 민간의 ‘경제할 의지’가 되살아나고 작금의 위기도 남보다 앞서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도 북핵 문제처럼 유리그릇 다루듯 신중하게 다뤄야 할 때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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