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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도시-재건축 앞둔 '반포주공'] 강남 아파트 시대 연 '개발의 상징'...50년 세월 묻고 역사속으로

<1970년대 주거난 해결 위해 조성>

첫 신도시 강남의 1호 대단지 아파트

추첨일 수천명 몰려...편·불법 잡음도

<산업화로 출현한 중산층을 위한 주거지>

94·95동은 2가구가 연결된 복층구조

라디에이터 난방에 부부욕실도 갖춰

반포주공 1단지 전경. 과거 반포주공 2·3단지였던 반포래이안퍼스티지와 반포자이가 높게 솟아 있는 반면 재건축을 추진 중인 반포 1단지는 아직 오래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송은석기자반포주공 1단지 전경. 과거 반포주공 2·3단지였던 반포래이안퍼스티지와 반포자이가 높게 솟아 있는 반면 재건축을 추진 중인 반포 1단지는 아직 오래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송은석기자



현대적 의미의 아파트는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처음 지어졌다. 거대한 콘크리트 박스 형태의 최초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당시만 해도 충격이자 저항과 같은 건물이었다. 건축계에서 화려함이 강조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는 2차 대전 이후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고 주거난을 겪을 이들을 위해 이 건물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건축의 목적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데 있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전 국민 중 대다수가 살고 있는 집이자 주택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단순한 집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파트다. 사람과 사람 간 공존을 바라며 감동을 만들어내고자 지어졌던 아파트는 인간의 욕망이 집약된 곳이자 한국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일종의 공간적 기호로 변모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30여년 전 지어진 초기 ‘강남 아파트’는 한국 현대사와 수도 서울이 변화된 과정이 녹아 있는 흥미로운 건축물이다. 이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반포주공아파트’를 기억하려는 시도들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총 3,786가구(현 반포3주구로 불리는 AID차관아파트 포함)로 지어진 반포주공은 강남 아파트 시대의 서막을 연 곳이다. 그리고 재건축으로 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될 반포주공은 강남에서 사실상 마지막까지 남은 저층 단지기도 하다.

반포 1단지 1차 분양 광고. /네이버 라이브러리 캡처반포 1단지 1차 분양 광고. /네이버 라이브러리 캡처


반포주공 1단지의 1977년 모습.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반포주공 1단지의 1977년 모습.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반포주공, 강남 아파트 시대를 시작하다=반포주공의 당초 이름은 ‘남서울아파트’였다.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아파트라는 뜻이다. 1971년 한 일간지에 게재된 남서울아파트의 1차 분양 광고를 보면 당시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단지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 남대문·서울시청 등과 멀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단지 남쪽에 위치한 지역(현 서초동·방배동 등)은 위치도에 그려 넣지도 않았다. 아마 지금이라면 반포·강남이라는 지명부터 광고 전면에 내세웠지 않을까. 중·고등학교, 법원 등 서초구에 들어선 주요 시설들은 이 단지의 매력을 더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지금의 강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서울은 곧 사대문 안을 의미했다.

반포주공 1단지 95동. 5층이 위주인 이 단지에서 94동과 95동은 내부가 복층형으로 설계된 까닭에 6층으로 지어졌다. 복층형 구조는 당시 중산층이 늘어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이완기기자반포주공 1단지 95동. 5층이 위주인 이 단지에서 94동과 95동은 내부가 복층형으로 설계된 까닭에 6층으로 지어졌다. 복층형 구조는 당시 중산층이 늘어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이완기기자


반포주공 1단지 내에 있는 초롱어린이공원. 반포주공 단지 내부에는 공원이 많이 조성돼 있다. 단지 내 공원에서 인근 학교의 행사도 자주 진행된다고 한다. /송은석기자반포주공 1단지 내에 있는 초롱어린이공원. 반포주공 단지 내부에는 공원이 많이 조성돼 있다. 단지 내 공원에서 인근 학교의 행사도 자주 진행된다고 한다. /송은석기자


서울은 한국전쟁 이후 포화상태였다. 전국 각지에서 가난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서울로 향했다. 1960년대 중·후반 세태를 그린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는 이를 잘 보여준다.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380개나 된다. (중략)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명이 정작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상황이 이런데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택지는 강북에 많지 않았다. 여기에 북한의 남침이 잦아져 인구 분산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남서울, 즉 강남 개발이 시작된 이유다. 이 과정에서 논밭 등을 택지로 만들어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고 1970년대 개막과 함께 첫 강남 아파트인 반포주공이 들어선다. 이후 1972년 민간 아파트에도 공공자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이 만들어지고 1976년 압구정·잠실 등에서 지금의 압구정 현대아파트, 잠실주공 등의 단지가 이어서 지어졌다.


하지만 단지의 출발점에는 잡음도 적지 않았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심재륜씨가 한 월간지에 쓴 글에는 반포주공(정확히는 AID차관아파트 현 3주구) 분양자 추첨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1973년 7월9일, 당시 주변을 둘러보아야 저 멀리 한강과 울퉁불퉁 야산밖에 안 보이던 서울 관악구 동작동(현 서초구 반포동)의 어느 널찍한 공터에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인지 그때로써는 희귀하던 자가용 승용차들도 꼬리를 물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1,490가구를 모집했던 이 단지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렸고 경쟁률은 5.6대1로 치솟았다. 높은 관심만큼 편법과 불법도 성행했다. 경찰 수사도 뒤따랐고 당첨자도 다시 가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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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주공 1단지의 내부. 40년이 넘은 반포 1단지 내부에 벽이 벗겨지고 오래된 흔적이 나타난다. /송은석기자반포주공 1단지의 내부. 40년이 넘은 반포 1단지 내부에 벽이 벗겨지고 오래된 흔적이 나타난다. /송은석기자


◇새로 태어난 중산층의 주거지 반포주공…40년 넘게 흐른 지금은?=‘신도시’ 강남은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계층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산업화로 인해 새로 생겨나는 중산층을 위해 만들어진 계획도시가 바로 강남이다. 물론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늘어나는 도시빈민과 서민층을 위한 집단 주거지를 조성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와우아파트 붕괴’ 등의 사건이 발생해 개발의 중심축을 중산층 주거지 조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반포주공은 이 과정에서 태어났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곳이 아파트 94동과 95동이다. 반포주공은 대부분 5층짜리 단지인데 94·95동만 6개 층이다. 이 동은 30평대 2가구가 내부에서 연결된 복층 구조다. 94·95동은 당시 보기 힘든 60평대(전용 196㎡)다. 주공은 당초 복층 120가구를 계획했지만 당시 정부가 호화주택을 허용하지 않아 60가구로 축소됐다. 또 서양식의 입식 생활을 구현하기 위해 ‘라디에이터’ 난방을 적용한 점, 아파트에서도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던 시절에 반포주공에는 부부침실과 부부욕실이 만들어진 점 등은 중산층이 주 수요층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중산층을 위한 거주지였던 반포주공은 약 50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이상 중산층이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곳이 됐다. 박배균 서울대 교수 등은 ‘강남 만들기, 강남 따라 하기와 한국의 도시 이데올로기’ 논문에서 강남이 도시 중산층의 공간에서 도시 상류층의 공간으로 바뀌면서 이에 속하는 주민들의 지위가 스스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업적적 지위’에서 상속을 받을 수 있는 ‘금수저’들만 진입할 수 있는 ‘귀속적 지위’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이완기기자 kingear@sedaily.com

이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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