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여의도 재개발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요람인 여의도는 60여년 전만 해도 별 쓸모없는 모래벌판이었다. 한강에 홍수가 나면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양말산만 보일락 말락 했다. 한강에 잠긴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어 보일 때면 사람들이 “너나 가져라”라며 ‘너의 섬’으로 부르던 것이 지금의 지명이 됐다는 속설도 있다. 여의도(汝矣島)는 너의 섬이라는 뜻이다. 모래사장이던 여의도가 지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된 것은 1967년 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다.




당시 김현욱 서울시장은 밤섬에서 채취한 골재와 백사장의 모래를 가져다 둘레 7.6㎞의 제방을 만들었다. 모래사장이던 여의도가 지금의 모습을 갖춰 비로소 육지화된 것이다. 벚꽃으로 유명한 현재의 윤중로는 여의도를 돌아가며 쌓은 제방인 ‘윤중제’ 위에 놓인 길이다. ‘불도저’로 불리던 김 시장은 서울시 한 해 예산의 절반쯤을 투입해 밤섬을 폭파한 지 110일 만에 완공하는 속도전을 펼쳤다. 하지만 개발의 바통은 경북도지사였던 양택식 시장에게 넘겨주고 만다. 여의도 개발과 동시에 추진한 시민아파트 건립사업 중 마포구 와우산 기슭에 지은 아파트 1개 동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시장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의도는 현대적 의미의 첫 번째 신도시다. 1971년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2층으로 당시로선 최고층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가 처음 설치된 아파트인 동시에 냉온수 급수와 스팀난방 시설을 갖춰 국내 현대식 아파트의 효시로 불린다. 단지 주변에 학교와 쇼핑센터 등을 배치한 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지금의 택지개발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이런 청사진을 그린 인물이 ‘한국의 로렌조’로 불리는 불멸의 건축가 김수근이다. 그의 천재성은,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도로와 인도를 1·2층으로 분리한 혁신적 도시계획에서 정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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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를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여의도를 전면 재개발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디자인이 독특한 건물에는 용적률 인센티브 등 건축특례까지 허용할 뜻도 밝혔다. 서울을 성냥갑 아파트 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재건축 35층 제한을 풀지 않겠다던 데 비하면 유연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혁신적인 도시계획 구상이 해외 출장 중에 하는 의례적인 말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권구찬 논설위원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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