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해외칼럼] 미-러 관계 악화는 예정된 수순

러 냉전 붕괴후 허약해졌지만

서구 지원 안해 변혁기회 상실

90년대말 권위주의로 돌아서

美와 충돌하는 영역도 넓어져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CNN ‘GPS’ 호스트




지난 월요일 도널드 트럼프의 헬싱키 기자회견은 내 기억으로는 미국 대통령이 저지른 역대 최악의 망발이었다. 게다가 헬싱키 회견의 후폭풍을 잠재우기 위한 터무니없는 말 바꾸기 시도로 그는 더욱 옹색한 처지가 됐다.


그러나 민망하고 낯 뜨거운 트럼프의 망동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러시아와의 긴장관계를 언급한 그의 다른 발언들이 묻혀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트럼프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수년간 이어진 미국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으로 우리와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가슴과 머리에 깊숙이 박힌 개념으로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해 그가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이것 역시 우리에게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심각한 이슈다.

워싱턴이 러시아를 ‘버렸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1990년 중반부터 심심치 않게 나돌았고 나 역시 그런 주장을 펴온 사람들 중 하나다. 1998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쓴 글에서 나는 “러시아 변혁이 냉전 이후 세계질서 재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5년 일본과 독일의 경우처럼 지구촌의 지속적인 평화는 러시아의 서방세계 편입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문제에 봉착한 대국 러시아가 냉전 이후 세계질서에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서방세계 편입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이 야심 찬 지원을 제공하지 않아서다. 워싱턴은 또 러시아의 일반 정서를 무시한 채 발칸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등 러시아의 심각한 안보 우려를 헤아리려 들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조지 H W 부시와 빌 클린턴 등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설정할 기회를 흘려보냈다고 믿는다.

또 하나 분명한 점은 당시 미러 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상태였고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는 이례적으로 허약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소비에트 시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위성국가들을 모조리 상실하면서 사실상 300년간 지속된 차리스트 제국의 지위도 잃었다. 경제는 ‘자유낙하’했고 사회는 무너져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확대하고 발칸반도에 위치한 러시아 우방국들에 무력개입을 하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여기에다 체첸의 분리독립을 막으려는 노력도 미국의 거센 비난에 부딪혔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보면 소련의 족쇄에서 풀려난 동유럽 신생 해방국들의 안보를 공고히 하는 것이 시급한 현안이었다.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유럽의 불안정을 가속화하고 인도주의적 악몽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민간인 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방대한 지역을 초토화하면서 러시아가 체첸에서 전개하던 참혹한 전쟁을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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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슈들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는 정면으로 대립했다.

1990년대 말에 이르러 러시아는 민주적 정도에서 더욱 멀리 벗어난다. 심지어 보리스 옐친 치하에서도 민주적 절차를 우회한 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존해 국정을 운영하는 사례가 흔했다.

러시아 내부의 민주세력은 늘 허약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인 학자 대니얼 트레이스먼은 러시아 하원에 해당하는 두마의 역대 선거에서 자유민주주의 개혁파가 올린 득표 수 총합이 늘 20%선을 밑돌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공산주의자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평균 35%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푸틴이 정권을 잡은 이래 자유민주주의를 향하던 움직임은 전면적 권위주의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푸틴은 단 한 번도 진보세력의 심각한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다.

러시아에 권위주의 체제가 확고하게 들어서면서 미국과 충돌을 빚는 영역도 넓어졌다. 그루지야(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 민주화 바람을 몰고 온 ‘색깔혁명’에 러시아는 잔뜩 긴장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이라크에 민주적인 체제가 갖춰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러시아의 불안감은 한층 커졌다.

반대로 워싱턴은 민주세력의 확장 움직임에 쾌재를 불렀다.

이런 대립상황에서 억압과 공포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안으로 자유와 희망을 전진시킬 것을 역설한 조지 W 부시의 ‘프리덤 어젠다(freedom agenda)’는 푸틴에게 자신의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이 고안한 장치처럼 보였을 터이다.

아마도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한 결정적 시기는 2000년도 중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꾸준한 유가 상승은 러시아의 1인당 국민총생산(GPD)을 두 배나 올려놓았고 모스크바의 국고에는 현금이 넘쳐났다.

새로운 풍요로움으로 부강해진 러시아는 공격적이고 야심 찬 시선으로 과거의 위성국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수직적 권력구조’의 최상부에 오른 푸틴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복원하는 한편 서구와 서구의 민주적 가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힘쓰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온 러시아의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무력개입,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와의 연합, 서방국가들을 겨냥한 사이버공격 등은 모두 푸틴의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이렇게 보면 1990년대 초반 서구가 러시아를 변혁시킬 기회를 잃었다는 주장은 타당하게 들린다.

설사 러시아를 변화시키려 시도했다 해도 성공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in the beginning) 러시아에 어두운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고 이들이 거의 20년 전에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러시아가 미국과 미국이 창조한 세계질서의 주적이 되기로 작정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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