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토닥토닥, 당신 손바닥이 내 어깨 두드리는 소리

작가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뭉클하듯

위로 본질은 문제해결·내용 아닌

스스로 극복할 에너지 깨우는 것

주고 받는 이 모두에 커다란 선물

정여울 작가



단어의 음절을 가만히 발음해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위안이 되는 의태어가 있다. 토닥토닥, 엄마가 아이를 달래며 손바닥을 아이의 몸 위에 두드리는 소리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어깨를 살포시 도닥이는 소리이기도 하다. 바닷가에서 차근차근 모래성을 쌓아올린 뒤 좀 더 오래 어여쁜 모양이 지속되도록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소리도 좋다. ‘토닥토닥’은 발음할 때마다 뭔가 든든해지는 느낌, 어딘가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함과 뭉클함이 차오르는 느낌을 주는 의태어다. 단어 자체에 위로의 뉘앙스를 그득히 품어 안고 있는 것이다.


토닥토닥이라는 의태어가 지닌 그윽한 위로의 힘을 생각하다가 문득 ‘내 삶에 위로가 되어준 순간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마음을 두드렸다. 첫째, 위로의 힘은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안도감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아무 조건 없이 걱정해주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정말 통장 잔고가 딱 0원이 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절망감 때문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 그저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엄마 목소리를 잠깐만 들어도 살아날 것만 같았다.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던 전철 안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좀처럼 먼저 전화를 하지 않는 무뚝뚝한 딸의 목소리를 듣고 엄마는 상황이 심각함을 눈치채셨지만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어, 엄마. 정말 그냥.” 이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냥’이라는 말로 엄마를 안심시키려는 순간 두 눈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끝까지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엄마는 걱정스러워하셨지만,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내가 진짜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뾰족한 묘수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왠지 그 힘겨운 순간을 내 힘으로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위로의 본질은 누군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면의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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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위로의 힘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무한한 공감의 에너지로부터 나온다. 그러니까 때로는 위로의 ‘내용’이 지극히 평범하더라도 위로의 ‘형식’이 중요하다. 나는 내 막냇동생에게 그런 위로의 에너지를 얻는데, 그녀는 서른이 넘어서도 엄청난 개구쟁이처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어린애 같은 장난을 치곤 한다. 막내는 항상 장난과 애교의 ‘형식’ 속에 따스한 마음이라는 ‘내용’을 담는다. 막내가 뭔가 멋진 말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한결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과 말투가 우리 가족을 안도하게 만든다. 내가 뭔가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면 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언니, 매번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돼. 고맙다는 말 안해도 돼.” 내가 작은 선물을 해주면 꼭 동네방네 자랑을 한다. “언니, 내 친구들이 언니 같은 큰언니가 자기도 있었으면 좋겠대.” 항상 칭찬과 애교와 감사의 미소를 입가에 달고 사는 내 동생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지, 정작 그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셋째, 위로의 본질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커다란 선물이 된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하루 종일 글쓰기 현장 실습과 멘토링을 하는 수업을 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쓰기에 매순간 창조적인 리액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 무척 어려웠다. 하루 종일 수업을 하다 보니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수업이 끝난 뒤 어느 독자분이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셨다. “이틀 동안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저는 정말 아름다운 피정(避靜)을 다녀온 느낌이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틀 동안 밤잠을 설치며 수업을 했던 그 모든 순간의 긴장감과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렇듯 위로란 참 못 말리는 인생의 묘약이다. 위로를 받는 사람에게도 위로를 주는 사람에게도, 또다시 힘겨운 오늘을 끝내 이겨낼 커다란 내면의 힘을 전달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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