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철아.”
구순의 노모는 칠순을 넘긴 아들을 보자마자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둘은 온몸을 꼭 끌어안았고 금강산호텔의 이산가족 상봉장은 이내 눈물바다가 됐다. 북측 며느리는 “어머니, 남편 사진입니다”라며 이금섬(92) 할머니에게 할머니 남편의 생전 사진을 건넸다. 아들 리상철(72)씨는 “아버지 모습입니다, 어머니”라며 오열했다. 두 사람은 상봉 내내 꼭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최고령 상봉자인 백성규(101) 할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아들·손녀와 함께 행사장에 입장했다. 한복을 입은 북한의 며느리와 양장을 입은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휠체어 옆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눈물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며느리는 먼저 떠난 남편의 옛 사진을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할아버지가 “사진 가져가도 돼요?”라고 묻자 며느리는 “가져가셔도 돼요, 집에 또 사진 있어요”라고 답했다. 북측 보장성원들은 할아버지 가족을 위해 디지털카메라로 즉석사진을 찍어줬다.
함경도 흥남에서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온 한신자(99) 할머니는 북측에 두고 온 두 딸, 김경실(72)씨와 김경영(71)씨를 부둥켜안았다. 당시 할머니는 두세 달만 피신했다가 돌아갈 요량으로 셋째딸 김경복(69)씨만 업고 먼저 피난 간 남편을 찾아갔다. 한 할머니는 “내가 피난 갔을 때…”라며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개성 출신의 신재천(83) 할아버지는 북측 여동생 신금순(70) 할머니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부모님과 함께 6남매가 살던 개성에서 살다 우연히 아버지 친구를 만나 남쪽으로 향했다. 65년 동안 홀로 이남 생활을 하며 고향과 가족 생각이 날 때마다 막냇동생 금순이를 생각나게 하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다. 할머니가 함께 나온 아들 라천주(52)씨를 조카라고 소개하자 할아버지는 조카까지 끌어안고 계속 오열했다.
30년 전 교직생활을 마감한 김병오(88) 할아버지는 북한의 여동생 김순옥(81) 할머니를 만났다. 한눈에도 꼭 닮은 오누이였다. 할머니는 “오빠, 나 평양의과대학 졸업한 여의사야”라며 오빠 앞에서 어린 동생처럼 자랑을 했다. 할아버지는 “여동생이 이렇게 잘됐다니 정말 영광”이라면서 취재진을 향해 “아이고, 기자 양반 우리 정말 닮았죠?”라고 물었다. 할머니도 “얼른 통일 돼서 같이 살게 해줘요. 통일 돼서 단 1분이라도 같이 살다 죽자, 오빠”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곽호환(85) 할아버지는 아들 상순(59)씨와 함께 이북의 조카 둘을 만났다. 조카 정철(55)씨와 영철(53)씨는 전시에 납북된 형의 아들들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여름, 마을에서 인민군 관계자들이 회의를 한다며 형도 소집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형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형과 함께 사라진 마을 사람들이 10명이 넘었다. 상순씨는 “아버님은 오래전부터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 큰아버지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며 “이번에 그 자녀들이라도 만나게 돼서 소원풀이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2년10개월 만에 재개된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물바다’였다. 상봉장 안에서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북측 접대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도 했지만 상봉장 여기저기서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낡은 사진을 꺼내 서로를 소개하고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세월의 힘은 무서웠다. 금강산 상봉장을 찾은 우리 측 이산가족 89명 중 겨우 7명만이 부모·자식 간의 직계 상봉이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조카와 며느리 손을 잡고 먼저 떠난 가족의 소식을 물었다.
20일 첫 행사인 단체상봉을 시작으로 남북 이산가족들은 오는 22일까지 2박3일간 여섯 차례에 걸쳐 11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길게는 69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들도 있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만남의 시간은 반나절도 되지 않는다. 이어 24일부터는 2박3일 동안 북측 이산가족 83명과 남측의 가족이 금강산에서 같은 방식으로 상봉한다. /금강산=공동취재단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