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청와대발 채권쇼크는 좀 어이가 없다. 적어도 발언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렇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출입기자와의 간담회에서 “미국이 금리를 인상한다 해도 한국 상황에 맞는 정책을 써야 한다”고 했다. 원칙론임에도 파장은 컸다. 벤치마크 격인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무려 6.6bp(1bp=0.01%포인트) 하락하면서 연중 최저치로 밀려났다. 시장이 통화 긴축 깜빡이를 켠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이 불편하다는 청와대의 의중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한 탓이다. 때마침 “금리 인상이 달갑지 않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날 발언과 겹치면서 시중 금리의 낙폭을 키웠다.
문제의 당사자는 경제 정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물이다. 만약 이 발언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시장이 알았더라면 채권시장이 아무 일 없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발언은 이주열 한은 총재가 직접 하기도 했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한다고 우리도 기계적으로 따라 올리지는 않겠다”고. 지난해 초부터 한두 번 던진 메시지가 아니었다.
청와대 당국자가 의도적으로 한 말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31일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들에게 모종의 압력을 가하겠다는 불순한 저의가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닐 것으로 믿는다. 취재진이 묻길래 무심코 내뱉은 말이겠거니 짐작된다.
한데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다. 취중 진담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혹 청와대 내부에 한은의 금리 인상이 달갑지 않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돼 있지 않나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논란이 한창인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 기준금리 인상은 상극이나 다름없다. 긴축의 고삐를 죄면 1,500조원에 이르는 가계 빚 부담은 저소득층이 먼저 받는다. 타격도 가장 클 것이다. 재정을 동원해 이런저런 복지혜택을 늘려 이들의 가처분소득을 끌어올리고 싶어도 금리 인상 원투펀치를 맞으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은이 6년여 만에 기준금리를 인상한 지난해 11월 이 난(欄)에 ‘에클스의 실수와 이주열의 책무’를 쓴 적이 있다. 깜빡이를 켰다면 신호대로 행동에 옮기되 긴축 통화 정책의 연착륙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급격한 출구전략 가동으로 경제를 망가뜨린 매리너 에클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담았다.
내일 금통위를 주재하는 이 총재가 9개월 만에 다시 갈림길에 섰다. 금통위는 지난달 금리 인상 소수의견을 내면서 추가 인상을 예고했지만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금리 결정이 늘 딜레마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정책 변수가 비단 최악의 고용 사정과 미중 무역전쟁 같은 거시경제 환경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 정부가 성과 내기에 조급한 소득주도 성장이 가세했다. 어쩌면 금통위원들의 머릿속에서는 악화한 거시경제 환경보다 소득주도 성장론이 더 신경 쓰일지 모를 일이다. 통계청장의 돌연한 교체도 찜찜한 구석이다. 그래서인지 시장은 동결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깜빡이를 켜고 계속 회전하지 않으면 시장은 실기론을 넘어 한은의 독립성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금리 인상이 늦을수록 향후 통화 정책의 행보는 더 어렵게 된다. 우리가 머뭇거리고 미국이 예상대로 연말까지 두 차례 인상하면 양국의 금리 격차는 1%포인트로 확대된다. 경제구조 개혁과 체질 개선은 초저금리 약물에 취해서는 어림도 없다. 유동성 과잉에 숨어 있는 잠재적 리스크를 들춰내고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지금의 정책 기조에서는 한은 외에 누구도 못 한다.
시장의 예측대로 금통위가 당장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확실한 신호등은 켜둬야 한다. 적어도 한미 금리 격차가 계속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정도는 말이다. /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