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첨밀밀’의 촬영지로 유명한 캔톤로드의 한복판을 바삐 오가고 있는 시민과 여행객들. 영화 ‘첨밀밀’에서 리밍과 장만위가 자전거를 타고 캔턴로드를 달리고 있다. 홍콩 영화사를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든 명작의 8할은 1980~1990년대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곧 왕자웨이·우위썬·첸커신처럼 훗날 거장의 자리에 오르는 감독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이들은 남다른 감수성으로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내며 홍콩 영화의 ‘화양연화(花樣年華·생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를 함께 열어젖혔다.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시절 홍콩 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주도했던 작품의 생명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영화들을 잉태한 촬영지는 오늘날 관광 명소로 변모했고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여행객들은 오래전 작품이 남긴 향기를 추억하며 도시 곳곳을 거닐고 있다. 이번 주의 여행은 홍콩 영화사를 수놓은 명작의 자취를 따라가는 ‘시네마 투어’다.
시네마 투어의 첫 번째 목적지는 침사추이 왼편에 위치한 캔턴로드다. 첸커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1996년)’에서 리밍과 장만위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그 거리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두 남녀는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서로의 온기 덕분에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언제든 어깨를 내어주는 상대가 있기에 가난을 잊고 콧노래 흥얼대며 거리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각자 처지가 변하면서 생기를 잃어간 둘의 사랑처럼 캔턴로드의 외양도 20년의 세월이 오롯이 느껴질 만큼 많이 바뀌었다. 소박하고 담백했던 그 거리가 지금은 휘황찬란한 명품 매장들로 가득하다. 홍콩 최대의 쇼핑몰로 유명한 하버시티가 이곳에 있고 관광객들의 ‘인증샷’ 포인트 중 하나인 침사추이 시계탑도 인근에 우뚝 솟아 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겉모습은 이렇게 달라졌지만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 마냥 두 손 꼭 잡고 활보하는 연인들을 보노라면 젊은 시절 장만위와 리밍이 나눴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 지금도 메아리치는 듯하다. 캔턴로드는 MTR ‘이스트 침사추이역’ L6번 출구에서 헤리티지 1881을 끼고 하버시티 방향으로 걷다 보면 금세 나온다.
영화 ‘첨밀밀’에 등장한 ‘빅토리아 파크’를 찾은 여행객들이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산책을 즐기고 있다. 영화 ‘첨밀밀’의 온기를 추억하고 싶은 여행객이 가보면 좋을 만한 또 다른 관광지로는 ‘빅토리아 파크’가 있다. MTR ‘코즈웨이 베이역’ 바로 앞에 위치한 이 공원은 ‘첨밀밀’의 두 남녀가 가수 덩리쥔의 테이프를 팔기 위해 노점상을 차린 곳이다. 둘은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기는커녕 재고 테이프만 남기고 노점상을 접지만 그들이 사랑했던 가수 덩리쥔의 운명은 암울하지 않았다. 영화의 아름다운 화면에 윤기를 더했던 덩리쥔의 노래는 ‘첨밀밀’이 그랬던 것처럼 홍콩을 넘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 ‘중경상림’의 촬영지인 ‘센트럴-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아래 도로를 오가는 시민과 여행객들. 영화 ‘중경상림’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집을 골똘히 응시하는 왕페이. 첸커신이 대중적인 멜로드라마에서 탁월한 재능을 뽐냈다면 왕자웨이는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사랑의 발랄함과 씁쓸한 이면을 두루 표현한 감독이다. 영화 ‘중경상림(1994년)’은 왕자웨이의 초기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MTR ‘센트럴역’ C번 출구를 나와 왼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센트럴-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이 영화에서 왕페이가 흠모하는 남자인 량차오웨이의 집을 골똘히 응시하던 바로 그 장소다. 1994년 완공된 800m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로 이름 그대로 센트럴과 미드레벨 지역을 잇기 위해 만들어진 이동 수단이다. 시작점에서 종착점까지 닿는 데 20분이나 걸린다. 경찰관인 량차오웨이는 왕페이가 점원으로 일하는 조그마한 패스트푸드 가게의 단골손님. 우수에 젖은 눈망울로 항상 샐러드를 주문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남몰래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 량차오웨이의 연인이 가게를 찾아와 왕페이에게 이별의 편지와 함께 량차오웨이의 집 열쇠를 맡기고 떠난다. 옳다구나, 왕페이는 에스컬레이터 너머로 바라만 봤던 아파트의 ‘무단 침입자’가 돼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식탁보를 바꾼다. 사랑이란 결국 나의 정성 어린 손길로 상대를 가꾸고 돌보는 일임을 왕자웨이는 왕페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표현한다.
영화 ‘영웅본색’의 촬영지인 황후상광장을 찾은 방문객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1980~1990년대 홍콩 영화를 훑으면서 우위썬을 빼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위썬은 할리우드나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도 독창적인 누아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거칠고 폭력적인 액션 연출과 낭만적 기운이 물씬 풍기는 감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구축했다. 수많은 작품이 있지만 우위썬의 대표작은 역시 ‘영웅본색(1986년)’이다. 이 영화에는 오늘날 홍콩을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인 황후상광장이 등장한다. 그 시절 혈기왕성한 청춘들의 우상으로 통했던 저우룬파가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경찰에게 추격을 당하던 곳이다. 높다란 빌딩들로 가득한 센트럴 지역에서 드물게 녹지대가 자리한 황후상광장은 19세기 후반 간척사업을 통해 새롭게 생겨난 땅 위에 조성됐다. 광장 한복판에 잠시 앉아 시원하게 하늘로 솟구치는 분수대를 바라보노라면 여행으로 쌓인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듯하고 그 옆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토머스 잭슨경(HSBC은행 설립자)의 동상은 한층 운치를 돋운다. /글·사진(홍콩)=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