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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77>이징 '연지백로']시든 연줄기 옆에 선 백로 한 쌍...일로연과를 기원하다

조선 대표 문인화가 이경윤의 서자

아버지에 꾸중들으며 흘린 눈물로

바닥에 새그림 그렸다는 일화 유명

안견풍에 유행하던 절파 화풍 절충

정밀하고 몽환적인 작품 주로 그려

이징 ‘연지백로’, 31×21㎝ 비단에 그린 수묵담채화.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이징 ‘연지백로’, 31×21㎝ 비단에 그린 수묵담채화.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열매 맺으려는 꽃잎은 떨어져야 하고 싹 틔우려는 씨앗은 파묻혀야 한다. 그렇게 꽃은 탄생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그래서 새로 태어나려면 일단 죽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처럼. ‘손자병법’과 더불어 중국의 2대 병서로 꼽히는 ‘오자병법’의 저자인 춘추전국시대 오기(BC 440~BC 381)의 이 명구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역사 속에 길이 살아 남았다. 얼마 전, 우연찮게 통화했던 소설가 이문열(70)과의 대화 끝에 이 그림이 생각났다. 대표적 ‘보수논객’으로 꼽히는 그는 최근 몇 년 간 거듭해 ‘보수의 죽음’을 제언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혁명을 펼치던 그 때 “보수는 죽어야 한다”면서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 바란다 했고 “쇠퇴하고 허물어진 정신의 허울 벗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보수는 다시 발 디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로 소설가가 굳이 일깨우지 않았어도 계절이 생각나게 했을 이 그림은 조선 중기 화가 이징(李澄·1581~1674년 이후)의 ‘연지백로(蓮池白鷺)’다. 다리 꼿꼿하고 부리 날카로운 백로 두 마리 사이로 잎사귀 끝이 말려들 정도로 시든 연대가 서 있다. 한여름 청청했던 연꽃이 떨어지는, 훌쩍 쫓아온 가을 입김이 늦여름의 끝자락을 날려버리는 요맘때를 그린 작품이다.

이징 ‘소상팔경도’ 중 소상강에 내리는 밤 비를 그린 ‘소상야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이징 ‘소상팔경도’ 중 소상강에 내리는 밤 비를 그린 ‘소상야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모름지기 화가가 꽃을 그린다면 꽃봉오리 잘 여문 희망찬 시기이거나 만개해 가장 화려한 순간을 포착할 법 하나, 연못에 연꽃은 다 떨어지고 꽃잎 떨어진 연의 씨방만 덩그러니 남았다. 여기에는 숨은 뜻이 있다. 백로의 로(鷺) 자는 길 로(路)자와 음이 같다. 그리고 연꽃 연(蓮) 자는 이어질 연(連) 자와 같은 소리로 읽힌다. 한 마리 백로(一鷺)와 연의 열매인 연과(蓮果)를 함께 그린 그림은 한 걸음에 나아가 과거에 연달아 급제하라는 뜻을 가진 ‘일로연과(一路連科)’와 같은 뜻이 된다. 그렇다. 연의 열매가 여물어서 그 위용을 드러내려면 꽃은 지고 잎은 시들어야 한다. 숨은 뜻을 새기고 다시 보면 시들어 고개 떨군 연잎이 그리 측은하지 만은 않다. 내년 봄 저 단단한 씨방에서 나온 씨앗이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니 그 향기는 보다 멀리 더 그윽하게 퍼져 나갈 것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 이징은 왕실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서자였다. 그의 아버지 이경윤(1545~1611)은 종친이라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학문과 특히 그림에 몰입했고 16세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가 됐다. 이경윤의 동생이자 이징의 숙부인 이영윤(1561~1611)까지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이징은 비록 서출이기는 했으나 명문 화가 집안이라는 든든한 배경 속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 이경윤은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중 둘째 아들인 이징을 유독 아꼈다. 그런데 하루는 어린 이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꼬박 사흘을 찾아다녔는데 뜻밖에도 아이는 집안에서, 그것도 귀한 그림 모아 둔 다락에서 발견됐다. 그림을 보며 따라 그리느라 배고픈 줄, 날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놀랐겠나. 매를 들어 볼기를 쳤더니 이 녀석이 흘러내린 눈물로 바닥에 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몇몇 문헌에 기록으로 전한다. 그 정도로 그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으니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 문인 허균(1569~1618)은 “탄은 이정(1569~1607)이 타계한 후 이징이 조선 제일의 화가”라 극찬했다. 타고난 재주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이징이 이미 20대 중반부터 사대부 사회에 이름을 알렸음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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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징은 왕실 그림 업무를 도맡아 보는 도화서 화원이 됐다. 태조의 영정을 보수하고 다시 그리는 작업에 참여했고, 소현 세자 혼례식의 행사용 병풍을 그렸다. 인조가 특히 이징을 총애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말 그림 등을 그리며 서화에 심취했다.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을 겪으며 어수선한 시국을 버텨나가던 인조는 어쩌면 잠시나마 그림에서 위안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인조는 이징을 궁궐에 들어오게 해 곁에 두고 산수와 화조 같은 그림을 그리게 했다. 오죽했으면 사간원으로부터 “임금이 하찮은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큰 뜻을 잃어버리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우려된다”면서 이징을 멀리하라는 강력한 항의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1638년에 인조가 또다시 이징을 불러 ‘화조산수화’를 그리게 하고 신하들의 충언을 듣게 되니, 이징의 탁월함과 인조의 과도함이 팽팽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징이 평생 비단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왕실 대군의 부름을 받아 새로 짓는 집의 단청 그리는 일도 마다할 수 없었으니 재능도 넘지 못할 신분으로 인한 갑갑함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이징 ‘소상팔경도’ 중 가을날 모래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떼를 그린 ‘평사낙안’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이징 ‘소상팔경도’ 중 가을날 모래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떼를 그린 ‘평사낙안’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그런 이징이 언제 사망했는지 생몰년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1674년 이후까지 생존했고, 90대에도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기록들이 전한다. 생애에 5남4녀의 자녀를 둘 정도로 다복했는데 그 중 막내 아들을 63세에 얻었다고 하니 ‘연지백로’ 속 연꽃처럼 맑고 백로처럼 꼿꼿하게 장수한 모양이다.

이 그림 ‘연지백로’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화첩의 8폭 그림 중 하나이며 이징의 기준작으로 꼽힌다. 단번에 과거급제하라는 중국 옛 말의 뜻대로라면 백로가 한 마리여야 하지만 조선의 화가들은 화합과 조화를 추구해 보통 백로 두 마리를 그렸고, 이징 또한 그랬다. 한 마리는 사냥에 성공해 물고기를 막 입에 넣고 삼키려는 중이다. 물고기가 퍼덕이는데도 가느다란 두 다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쳐든 자세가 범상치 않다. 그 옆의 한 마리는 매서운 눈으로 물 위를 노려보며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린 모습이 이내 곧 물고기를 잡을 듯하다. 두 백로의 상반된 자세가 균형감을 이루는 동시에 세부 묘사도 치밀하다. 바탕의 흰색을 그대로 두고 몇 개의 옅은 선 만으로 간략히 그렸지만 깃털의 질감과 부리·다리의 딴딴함이 느껴진다. 말리고 시든 연잎은 높낮이를 달리해 다채롭고, 날카롭게 솟은 갈대가 둥근 연과 대구를 이룬다. 간략하게 그린 물망초와 마름을 연못 군데군데에 두어 화면 전체에 생기를 더해 준 것도 재치있다.

이징 ‘니금산수도’ 87.9x63.6cm 크기 비단에 금으로 그린 작품.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이징 ‘니금산수도’ 87.9x63.6cm 크기 비단에 금으로 그린 작품.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이징의 또 다른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소상팔경도’, 검은 비단에 금과 진흙을 개어 만든 안료로 그린 ‘니금산수도’가 유명하다. 가운데 소나무를 두고 양 옆으로 누각 한 채씩을 놓은 그의 금빛 산수는 그야말로 꿈에 본 듯 몽환적인 풍경이다. 이징의 이들 산수화를 보면 화가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활동했던 17세기에 가장 유행했던 것은 명대 저장성 지방 양식의 영향을 받은 ‘절파(浙派) 화풍’이었다. 하지만 이징의 그림에서는 그보다 앞선 조선 초기의 대표 화가 안견을 추앙한 ‘안견파 화풍’이 감지된다. 자칫 예스러운 화풍이라 치부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화법을 존중하고 따랐던 것. 그러면서도 은근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또한 조화와 균형미를 추구했으니 이징은 개혁적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왜란과 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땅에서 어둠에서도 빛을 발하는 그림을 통해 이징이 그리고 싶은 이상향은 이처럼 당당하고 희망찼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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