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처럼 상사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맨은 언제나 존재했다.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가뭄이 너무 심해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대책을 구했다. 태종의 정책을 비판해야 하는 껄끄러운 질문에 모두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사간원 정6품 정초가 간언했다. “둔전과 연호미(예비군을 먹여 살리기 위한 비상식량) 같은 것이 백성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정초는 이로 인해 한직으로 가야 했지만 그의 직언 덕분에 백성들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예도 있다. 연산군의 폭정에 모두가 숨죽이던 시절 내시 김처선이 나섰다. “내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난 김처선은 연산군의 처용무에 음란함이 도를 넘자 엎드려 말했다. “단종부터 네 임금을 섬겼으나 전하와 같은 놀이를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임금이 활을 쏘고 다리를 잘랐지만 그의 간언은 그치지 않았다. 김처선은 비록 죽었지만 세상은 그를 충신으로 기억한다. 역사 속에 ‘예스맨(Yes-man)’의 이름은 사라져도 ‘노맨’은 남았음이다.
미국 정가가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의 저서 ‘공포:백악관의 트럼프’로 연일 시끄럽다. 이번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간 불화설이 등장했다. 주한미군과 시리아 문제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매티스 장관이 번번이 반대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이라면 매티스 장관을 둘러싼 최근의 경질설은 그가 든 반기에 대한 트럼프의 반격일 것이다. 후대는 이 장면을 두고 역사에 어떻게 기록할지 자못 궁금하다. /송영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