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이탈리아에 처음 왔을 때는 유명한 조각가들만 받는 말로만 듣던 상이었는데 오늘 제가 받았네요. 이곳에 살면서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 작품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한국인으로의 정체성과 무의식이 오히려 이곳에서 특별한 관심과 인정을 받는 원동력이 됐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어요.”
조각가 박은선(53·사진)이 ‘조각의 성지’로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시가 주는 최고의 조각상인 ‘프라텔리 로셀리’상의 제28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2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에트라산타 산타고스티노교회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박 작가는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이같이 소감을 전했다. 박 작가는 “차가운 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작업이었는데 큰 상까지 받게 돼 뜻깊고 영광스럽다”면서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동양인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묵묵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이웃과 어울리다 보니 이제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수상을 축하하며 이탈리아 성악가가 부르는 ‘그리운 금강산’이 들려왔다.
피에트라산타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가 영감을 줄 돌을 찾아 전 유럽을 헤매다 자리 잡은 이래 조각의 성지가 됐다. 20세기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 호안 미로, 헨리 무어, 이사무 노구치 같은 대가들이 거쳐 갔고 미국의 제프 쿤스나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토니 크래그 같은 현대미술가들도 돌 조각 작업 만은 피에트라산타의 공방에서 진행한다. 그런 배경을 가진 프라텔리 로셀리상은 지난 1991년 ‘뚱뚱이 인물’로 유명한 페르난도 보테로를 제1회 수상자로 배출하며 권위를 쌓았다. 이 상을 한국인이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동양인으로는 1995년 야스다 칸 등 일본인 조각가 2명에 이어 세 번째다.
이곳에서 작업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조각의 성지답게 주변이 모두 조각의 재료로 둘러싸여 어디를 두리번거리든 30분 안에 원하는 재료를 구할 수 있다”면서 “유명한 거장들이 곳곳에서 작업하니 나 또한 매일 눈만 뜨면 작업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고 말했다. 경희대 조소과, 이탈리아 카라라국립미술원을 졸업한 박 작가는 대리석과 화강암을 이용해 두 가지 돌을 교차해 쌓는 동시에 그 안에 균열을 내 ‘숨통’을 만드는 고유의 방식을 구축했다. 동양적인 곡선과 조형미가 살아 있는 현대조각으로 유럽에서 먼저 인정받아 명성을 떨치고 있다. 2010년 이후 로마·파도바 등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와 프랑스·벨기에·스위스·룩셈부르크·미국·파나마·콜롬비아 등 유럽과 미주에서 종횡무진 활동한 그는 2016년 7월 현대 작가로는 드물게 르네상스의 본산인 피렌체의 두오모 등 대표 공간에서 피렌체시의 초청으로 야외전시를 열었다. 지난해 8월에는 피에트라산타의 중심부에서 전시를 열었고 도시 인구보다 더 많은 3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아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유일한 야외조각 작품인 ‘복제의 연속’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흰색과 회색의 대리석이 교차하는 구(球)형이 층층이 쌓인 형태다.
타향살이가 힘겹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 작가는 “한국은 언제나 돌아가고픈 고향이지만 이제는 이탈리아 사람뿐 아니라 유럽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이들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겼다”면서 “대신 이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두루 알리고 싶다”고 답했다. 덧붙여 그는 “이탈리아 포르테 데이 마르미시와 프랑스 라바울시 미술관 전시가 진행되고 있고 미국 휴스턴갤러리와 이탈리아 토리노시의 대규모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며 “내가 무엇이 될 것이라는 포부보다 내가 원하는,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25년 전 이탈리아로 함께 떠난 화가 아내 이경희씨와 두 아들에게 이 영광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