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집행보다 자발적 배상 유도=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부분은 일본 기업의 실제 배상 여부다. 일각에서는 일본 기업들의 국내 잔류 재산을 법원이 강제집행하는 방안을 제시하지만 법조인들은 이를 ‘최후의 방법’으로 보고 있다. 강제집행 시 해당 기업과 일본의 외교적 반발이 예상되는데다 집행 과정에서 소모될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제징용 사건의 피고였던 신일철주금이 보유한 3.3%가량의 포스코 지분의 경우 미국주식예탁증권(ADR) 형태로 돼 있어 미국 법원의 승인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본 기업들이 보유한 일본 내 재산은 현지 법원의 승인이 필요해 사실상 강제집행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부가 일본과 강경 대치하기보다는 최대한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다.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을 대리한 김세은 변호사는 “강제집행은 현재로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현지 시민단체 등 여러 루트로 해당 기업에 접촉해 자발적 배상을 유도하는 중”이라며 “사건마다 대응하기보다 최대한 많은 피해자들의 확정 판결을 모아 배상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31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정부는) 모든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방관한 행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이 돌아가신 후에라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추가 소송, 소멸시효 가능성 낮아=앞으로 추가 소송을 제기할 피해자들이 소멸시효를 걱정할 필요는 거의 없는 것으로 분석됐다. 민법상 일반적인 손해배상 시효는 ‘손해·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앞선 판결을 통해 국내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된 2005년 2월 전까지 피해자들이 권리의 존재나 권리행사 가능성을 몰랐다고 인정했다. 추가 소송자들의 경우도 이번 대법원 판결을 기점으로 권리행사 가능성을 처음 인지했다고 주장하면 법원에서 이를 인정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힘입어 광주고등법원도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2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기일을 오는 12월5일로 2주 앞당기기로 하는 등 국내에서 진행되는 관련 재판들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미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도 유족들이 소송을 낼 수 있다. 다만 자신이 피해자나 유족에 해당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정부가 적극적으로 고지 행위를 해야 하는 것으로 지적됐다. 근로정신대 등을 부끄럽게 여겨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망한 피해자도 많은데다 아직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한 정부의 정확한 통계도 없는 상태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권리행사 장애사유 인정 여부는 재판부의 재량이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일률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정치적 쇼잉’=일본 외무성이 대법원 판결 직후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데 대해서는 대다수 법조인이 정치적 ‘쇼잉’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제소를 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응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해당 재판소는 국가 간 분쟁을 다루기 때문에 강제징용 손해배상과 같은 민사 사건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다만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가 국제 여론전을 펼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최봉태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위 위원장은 “국제사법재판소 결과에는 강제성도 없다”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