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소비자직접의뢰(DTC) 유전자검사를 사업모델로 하는 미국기업 ‘헬릭스’는 그간 모은 유전자데이터로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헬스케어 스타트업으로 꼽힌다. 누적투자액만 3억2,000만달러(약 3,612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헬릭스는 한국에서는 온전히 사업을 할 수 없다. 생명윤리법이 유전자검사가 가능한 항목을 12가지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이상의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스마트폰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원격진료 앱을 개발한 스웨덴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크라이(KRY)’는 한국에서 사업이 아예 불가능하다. 간편성과 안전성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9,500만달러(약1,072억원)의 투자를 유치했지만, 원격의료를 원천 차단하고 있는 현행 국내 의료법 아래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글로벌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중 63곳은 지나친 규제로 국내에서는 사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아산나눔재단과 구글 스타트업캠퍼스,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 스타트업얼라이언스 등 스타트업단체들은 22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디지털 헬스케어 정책 제안발표회’에서 디지털 헬스케어’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보고서는 규제 환경으로 인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고 있는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실태와 현황을 자세히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에 해당하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의료인력과 90%가 넘는 의료기관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 세계 1위 스마트폰 보급률 등 높은 수준의 의료 및 디지털 인프라를 갖추고 있음에도 글로벌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중 국내 업체는 단 한 곳도 없다.
더 나아가 이들 스타트업이 한국에 진출한다 해도 100개 기업 중 63개는 국내의 강력한 규제 때문에 사업 영위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72곳과 영국·인도 4곳, 스웨덴·프랑스 2곳 등으로 구성된 글로벌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이 유치한 누적투자액은 무려 18억달러(약2조300억원)였다. 누적 투자액 기준으로 사업 가능성을 따질 경우 75%의 스타트업이 국내에서 기업 활동을 하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글로벌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게 만드는 주요 규제는 원격의료 금지(누적 투자액 기준 44%의 기업이 저촉), 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의뢰하는 DTC 유전자 검사항목 제한(24%), 진료 데이터 활용에 대한 규제(7%) 등이었다.
보고서는 국내에서 글로벌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비식별 의료정보 개념 명확화 △원격의료 범위확대 △소비자직접의뢰(DTC) 유전자 검사허용항목 확대 등의 조치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스타트업 제품이 인허가 평가 절차를 거쳐 시장에 나오기까지 주요 선진국에 5~7배에 달하는 500일 이상 걸린다며 지나치게 복잡한 인허가 평가 절차의 간소화와 산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적 자원 확보, 신기술의 신속한 시장 진출을 돕는 제도 확충을 촉구했다.
시장 활성화에 측면에서도 치료에서 예방으로 바뀌는 의료 패러다임에 맞춰 질병 예방을 위한 디지털 의료기기의 건강관리 수가 도입, 혁신적인 디지털 의료기기 도입에 대한 인센티브 지급, 의료 시스템 및 규제 수출 등을 포함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디지털 헬스케어는 한국이 직면한 사회적, 경제적 이슈 해결에 도움을 줄 제2의 성장 동력”이라며 “지금이 국내 스타트업들이 글로벌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인만큼, 선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규제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 발간을 주도한 이경숙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한국은 높은 수준의 의료 기술력, 인프라, ICT 보급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서비스가 국내 헬스케어 관련 규제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보고서가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생태계의 질적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