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숙은 최고의 배우입니다. 언어 문제만 해결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브로드웨이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2013년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연출로 한국을 찾은 브로드웨이 스타 제임스 바버가 꺼낸 말이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미녀와 야수’ 등의 주연으로 활동하던 그는 당시 인터뷰 내내 신영숙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연을 취재하다보면 이따금씩 이 배우를 저 공연에 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엘리자벳’ 초연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영숙이 꼭 한번쯤은 저 무대에 섰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왔다. 스타캐스팅이 우선인 제작사 특성상 온갖 조연상을 휩쓴 배우라 할지라도 타이틀롤을 맡기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터. 그래서 이번 공연 그의 캐스팅 소식은 어느 때보다도 놀랍게 다가왔다.
수년간 신영숙을 지켜보며 아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왔다. 발성과 발음, 캐릭터 분석과 표현력 등 싱어(Singer)로서뿐 아니라 배우(Actor)로서도 흠잡을 곳 없었다. 보통 대극장 무대에 서는 뮤지컬배우들이 노래에 집중하는 반면 서울시극단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그의 내공은 지금까지 어느 작품에서 어느 역할을 맡겨도 제 몫 이상을 해냈다.
한국에서 공연되는 ‘엘리자벳’은 오리지널보다 산만하다. 조연인 죽음(TOD)과 루케니가 이야기를 잡아먹는 경향이 있다. 원작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불렸던 엘리자벳의 삶을 바탕으로 자유와 억압,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한국 공연에서 이 묵직한 고민을 안고 극장을 벗어났던 기억은 없다. 쇼(Show) 즉 보여주기에 집중한 탓이라고 본다.
이번 공연도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오랫동안 주목해 온 배우가 최고의 무대에서 마지막에 박수받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 오스트리아 현지에서 본 ‘엘리자벳’의 감동의 끝에 그의 얼굴이 떠오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지레짐작은 이래서 안된다. 신영숙이 종횡무진 누비는 무대는 놀라웠다. 그가 표현하는 ‘엘리자벳’에게서는 10대부터 60세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흐름이 보였다. 10여회 공연을 봤으나 이전까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인물의 감정들이 세밀하게 전달됐다.
그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던 10대, 황제와 결혼 후 억압받던 시기, 대공비 소피를 제치고 권력의 정점에 선 모습, 황제에 대한 배신감으로 황실 밖으로 돌던 때, 아들인 황태자 루돌프의 죽음 이후 몸과 마음 모두 무너진 현실을 각기 다른 목소리와 몸짓으로 풀어냈다.
특히 하이라이트 넘버인 ‘나는 나만의 것’이 등장하는 신에서의 목소리 변화는 전율을 일으켰다. 노래는 폐쇄적인 황궁의 예법을 강요받던 그녀가 ‘내 삶을 내가 선택한다’며 권력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을 3분여의 시간에 담아낸다. 신영숙은 미세한 떨림을 안은 미성에서 시작해 서서히 소리에 힘을 주다 절정에 이르러 특유의 진성을 내지르며 관객을 압도한다.
연기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마지막 신이다. 신체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루케니의 흉기에 찔린 후 죽음을 맞는 과정. 검은 상복에서 빠져나와 흰 드레스를 입은 채 자유를 향해 죽음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대극장 뮤지컬에서 본 적 없는 ‘연기’였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늙은 귀부인에서 자유를 꿈꾸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속도와 표정을 신중하게 계산한 부분은 작품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나올 수 있는 표현이다.
지난 수년간 만나온 신영숙은 작품 내적, 외적은 물론 뮤지컬 넘버 한곡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에도 주저한 적 없었다.
2011년 그를 처음 주목받게 한 ‘모차르트!’ 공연당시 넘버 ‘황금별’을 두고 “처음 들었을 때는 노래를 잘 한다 생각했고, 두 번 들었을 때는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남작부인의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세 번째 들었을 때는 신영숙 본인이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자 “어쩜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세요”라고 눈물을 보이며 “모든 이야기는 사랑에서부터 나온다”고 답했다.
사랑에서 시작하는 인물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담 드파르지,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외에도 ‘명성황후’, ‘팬텀’, ‘웃는남자’ 등을 거쳐 ‘엘리자벳’까지 다다랐다.
이와 더불어 ‘성악’과 ‘가요’가 주를 이루는 배우들의 창법 사이에서도 일부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도 신영숙의 노래는 확실히 차별화된다. ‘레베카’ 공연 당시 그는 공연을 마친 후 얼굴을 보자마자 “힘줘 부르는 사이에 흘리는 ‘바람이 부르는 그노래’라는 가사 정확히 들렸어요?”라고 물었다. “안 들렸다”고 답하자 “아이고”라면서 다음 공연에서 또 이를 극복해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가수들이 뮤지컬 배우로 변신하며 시장이 확대됐다. 김준수를 비롯해 옥주현, 바다부터 박효신, 아이비, 조권, 최근에는 아이돌 스타들까지 대거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품성 하락에 대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나, 스타캐스팅으로 인한 객석 점유율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이 시점에서 뮤지컬 시장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배우의 인지도다. 뮤지컬 무대에만 섰던 배우들은 이제 심심치 않게 TV에서 만날 수 있으나, 스타캐스팅에 밀려 조연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스타캐스팅에 가장 공을 들이던 제작사가 이런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신영숙에게 타이틀롤 역할을 맡긴 것은 고무적이다. 관객에게 보다 작품성 있는 공연을 선사함과 동시에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수많은 이들에게 유명 스타가 아니라도, 처음부터 주연급이 아니었어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설 수 있을 거라는, 꺼져가던 불씨마저 그대로 품고 있게 만들었다. 신영숙은 최고다.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