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1851~1895년)는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제의 침탈에 온몸으로 저항한 ‘조선의 국모’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남편인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권력욕의 화신’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조국의 운명에 체념만 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굳세게 맞서 살다가 떠난 여걸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1895년 10월 경복궁으로 자객을 보내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은 것도 명성황후야말로 일본의 조선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 여주시의 명성로에 가면 유적지로 꾸며놓은 ‘명성황후 생가’가 있다. 조선 말기 문신인 민치록의 딸로 태어난 명성황후는 1851년에 태어나 8세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지난 1996년 행랑채와 사랑채·초당 등을 복원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전통 가옥구조를 그대로 간직한 생가의 안채에는 황후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별당에는 어린 시절부터 글공부를 좋아했던 황후가 책을 읽는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전시돼 있다. 생가를 빠져나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가 나온다. 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41년(1904년)에 세운 이 비석은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에 우뚝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1904년 5월 어느 날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뜻의 한자어가 적혀 있는데 황후의 아들이자 조선의 27대 임금인 순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의 탄생을 둘러싼 흔적은 생가 오른편에 자리한 ‘소원바위’에도 묻어 있다. 민치록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두 번째 부인을 맞아 1남2녀를 낳았다. 하지만 이들 세 자녀를 모두 어린 나이에 하늘로 떠나 보낸 후 민치록은 부인과 함께 매일 같이 이 바위 아래서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기도에 효험이 있었던지 민치록이 53세 되던 해에 마침내 딸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훗날 조선의 국모가 되는 명성황후였다. 어릴 적부터 개성이 뚜렷하고 굽힘이 없었던 성격은 왕비가 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남편인 고종이 성년에 이르자 친정(親政)을 하도록 설득하면서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주도했다.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조선 병탄의 야욕을 드러내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르렀을 때는 주변 열강인 러시아·미국과 손잡는 외교 전략으로 국체를 보전하고자 했다.
‘나라의 이익은 안중에 없이 시아버지(흥선대원군)와의 권력투쟁만 일삼은 왕비’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확산하던 와중에 일반 대중이 황후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뜻밖에도 대중문화 작품이었다. 특히 황후를 시대를 앞서 간 정치가로, 결기 가득한 여성으로 그려낸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5년 초연 이래 23년이 흐른 지금까지 관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래는 언제 들어도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한다. “한 발 나아가면 빛나는 자주와 독립/ 한발 물러서면 예속과 핍박/ 용기와 지혜로 힘 모아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 하리/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명성황후 생가는 동절기(11~2월)에는 오후5시, 하절기(3~10월)에는 오후6시까지 개방하며 개장 시간은 오전9시로 동일하다. 입장료는 별도로 없고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여주까지 가서 명성황후 생가만 둘러보고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뭔가 아쉽고 허전하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명성황후 생가에서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강천섬 여행을 추천한다. 한국수자원공사가 조성한 인공섬인 이곳은 ‘한강 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이 섬 안에는 법정 보호종인 단양쑥부쟁이가 군락을 이루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갈대밭도 드넓게 펼쳐져 있다. 섬 인근에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트레킹을 즐기기에도 그만이고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강천교는 자전거와 도보로만 통행할 수 있다. /글·사진(여주)=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