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에게 대한제국의 역사는 ‘지우고 싶은 과거’로 인식됐다. 대한제국 황제이자 명성황후의 남편이었던 고종은 국제 정세를 읽는 눈도, 개혁을 실현할 능력도 모자랐다. 결국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고종은 ‘망국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됐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대한제국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1897년 10월 고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대한제국 건립을 선포한 것은 우리나라가 근대적 의미의 주권 국가임을 세계에 천명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문화재청 소속 기관인 ‘덕수궁 관리소’가 최근 개방한 서울 중구 정동의 ‘고종의 길’이 시민들 사이에서 도심 산책로로 각광을 받고 있다. 2년에 걸친 복원 공사를 마치고 공개된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옛 러시아 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을 잇는 길이다. 지난 8월 한 달간 시범 개방을 한 데 이어 10월 말 정식으로 개방된 이 길은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길을 복원한 산책로로 길이는 120m 정도 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걷기 시작해 고종의 길 서쪽 끝으로 나가면 옛 러시아 공사관의 3층 전망탑이 나온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지만 대한제국은 이 길 끝에서 시작됐다. 아내를 잃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며 고종은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간 머무른 뒤 고종은 덕수궁(당시 경운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창건했다. 특별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옷깃을 여미고 차분히 걷다 보면 찬란한 유산을 꽃피운 조선왕조 500년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에도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군 역사적 뿌리가 닿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고종의 길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개방하며 동절기(11~1월) 운영시간은 오전9시부터 오후5시30분까지다. 입장료는 무료다. /글·사진=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