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꾸밈없는 언어, 솔직하고 다정한 언어가 그리워질 때

작가

열정과 순수 간직한 사람만이

'사랑'의 축복 누릴 자격 있어

좀 더 자주 깊고 따스한 말로

소중한 이에 마음 전해줘야

정여울 작가



굳이 말하지 않고도 언젠가는 반드시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좋아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귀찮아하는 마음, 애달파하는 마음, 끊임없이 기다리는 마음. 이런 마음들은 강력한 심리적 파장을 지니고 있어, 말하지 않고도 언젠가는 결국 상대방에게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찰떡같이, 아주 세세하게 알아주기를 바라다가는 큰코다칠 때가 많다. 상대방이 말로 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짐작하고 눈치채며 마치 텔레파시처럼 척척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표현을 아끼면 상대방은 어느 순간 지치게 되고,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는데, 그건 어쩌면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라는 의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과묵함을 애써 미화할 필요도 없고, ‘침묵의 언어’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때로는 과잉해석이 될 위험이 있다. 특히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표현을 아끼지 않는 것이 좋다.


‘밀당’이나 ‘츤데레’(차가운 모습과 따뜻한 모습이 공존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일본어 의태어 츤츤과 데레레에서 유래) 같은 태도는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을 주게 되어 있다. ‘밀당’과 ‘츤데레’는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고 통제하거나 자신의 표현을 극도로 아낌으로써 상대방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심리게임이다. ‘밀당’은 사랑을 갈구하는 상대방을 애타게 함으로써, ‘츤데레’는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다정한 언어를 최대한 아낌으로써 감정의 인색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순간적으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게 해줄지는 몰라도, 진심으로 꾸밈없는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쉽게 상처를 준다.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당신의 따스하고 다정한 언어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표현이 부담스러울 때는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조금 더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해도 좋다.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쑥스러울 때는 ‘보고 싶다’라고 말해도 좋다. 때로는 ‘보고 싶다’라는 평범한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애틋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리운 그 사람이 ‘보고 싶다’라는 말 한 마디만 들려주어도, 힘겨운 오늘을 꿋꿋이 견딜 수 있는 연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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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들은 어른들보다 사회화가 덜 되어 있어, 굳이 눈치 보거나 이리저리 재지 않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곤 하는데, 그럴 때 아이들의 언어가 어른의 심금을 울린다. 친구의 큰딸이 어느 날 엄마가 ‘둘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엄마, 이 다음에 아기가 태어나도 나를 지금처럼 잘 돌봐 주실 거죠?” 어른들은 이럴 때 아이들의 순수하면서도 애처로운 마음에 눈을 뜨며, 어린 시절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뼈아픈 기시감을 느낀다. 첫째는 둘째가 태어나기도 전에 ‘혹시 내가 지금처럼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할까’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아이나 어른이나 이토록 강렬하다.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괴로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사람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 때문일 경우가 많다.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고, 별 것도 아닌 일로 심하게 화를 내고, 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필요 이상으로 심한 말을 해버린 날. 그날 그 좋지 않은 대화가 ‘그 사람과의 마지막 대화’로 기억되는 경우, 우리는 상대방과 제대로 된 작별인사, 아름다운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게 된다. “귀찮아, 아, 됐어. 신경 쓰지 마. 됐다고! 듣기 싫어!” 이런 지독한 말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말이 되어버린다면,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이나 그 길을 배웅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무겁겠는가. 연말이 다가오고, 날씨가 추워질수록, 사람들이 서로에게 전해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가 이 무시무시한 몸과 마음의 추위를 녹여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사랑을 고백할 것이라면 더 늦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타이밍을 놓치기 전에, 그 마음을 꾸밈없이 보여주자. 사랑은 유치한 주도권 싸움이 아니며, 아직 열정과 순수를 간직한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찬란한 축복이니까. 우리는 좀 더 자주, 더 깊고 따스한 언어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정과 연대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연락하지 않는 지금도, 당신의 따스한 말 한마디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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