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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다’ 김덕수 “가족과 함께 못해…어쩔 수 없는 예인의 운명”

사진=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방송 화면 캡처사진=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방송 화면 캡처



오늘(1일) 방송되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는 ‘이 시대 최고의 광대, 사물놀이 김덕수’ 편이 전파를 탄다.

▲ 거장은 멈추지 않는다! - 이 시대 최고의 광대, 김덕수


“이해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잖아요. 엄청난, 안타까울 정도의 아쉬움이죠. 그 아름다운 시간을 아이들과 가족들과 함께 못했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예인의 운명이죠.”

- 김덕수 인터뷰 中

‘사물노리안’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전 세계인에게 널리 퍼진 ‘사물놀이’가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았다. 이 사물놀이의 선구자가 바로 이 시대 최고의 광대, 김덕수(67)다. 남사당패였던 아버지 故김문학 선생의 손에 이끌려 국악에 입문한 다섯 살 때부터 지난 60년여 간 줄곧 장구 신동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김덕수 명인. 70년대 반정부 집회를 선동한다는 이유로 풍물패의 거리 공연이 금지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되자, 김덕수는 고민 끝에 명맥이 끊겨가던 전통 농악을 실내 타악 4중주로 재탄생 시켰고, 그것이 바로 사물놀이의 시초가 됐다.

사물놀이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인생. 곧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편히 누워 쉬는 법이 없다. 그 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부터 재즈, 힙합, 영화음악까지, 다양한 대중음악가와 소통하며 새로운 모색을 해온 길도 굽이굽이. 장구를 두드리며 평생을 길 위에서 살아온 김덕수 명인은 죽는 날까지 사물놀이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 말한다. ‘사물놀이’가 과거의 음악으로 치부되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음악이길 바라는 마음, 또한 전 세계 모두가 즐기는 음악이길 바라는 뜻에서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바람과는 다르다. 지난봄, 20년 동안 머물렀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의 교단에서 내려온 후로 그간 어렵게 버텨왔던 사물놀이 전용 극장까지 정리하게 됐다. 사물놀이 보급을 위해 가족들을 뒷전에 두면서까지 애썼던 일들이었기에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이 허무하기만 한 김덕수. 마음만은 여전히 마당을 뛰어놀던 청춘인데 정년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는데... 생전 느껴보지 못한 변화를 두고 ‘시간의 경계에 살고 있다’고 표현하는 사물놀이 거장 김덕수, 그는 요즘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 “아티스트로서는 100점, 아버지로서는 20점짜리 가장”


“선생님하고 악수 한 번 해보셨어요? 선생님 악수하실 때 손에 힘이, 힘에서 전해지는 에너지가 무대에서 늘 그렇게 선생님이 발산할 수 있는 그 에너지를 후배들한테 전해주시는 분이세요.”



- 국악인 박애리 인터뷰 中

“무대에서 쓰러지는 날까지 연주하겠다고 해도 실제로 그런 사람 별로 없거든요. 근데 저희 아버지는 그럴 거 같아요. 아들로서는 응원의 한마디보다 건강을 챙기셨으면 좋겠어요.”

- 아들/가수 김용훈 인터뷰 中

늘 피날레 무대를 장식하며 거장 대우를 받는 명인 김덕수. 영광과 명예를 거머쥔 삶이지만 1년 365일 중 200일은 집을 떠나 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다. 사물놀이가 음악의 한 장르로 성장해 세계인에게 알리기까지 40년. 그 시간 동안 아내 김리혜(66세)는 혼자 살림하며 두 아들을 키워야 했다. 힙합 가수 출신인 큰아들 김용훈(37세)은 아버지 김덕수를 두고 ‘아빠로서는 20~30점, 아티스트로서는 100점’이라고 했을 정도인데...

사물놀이밖에는 모르고 살았기에 자식들 커가는 모습도 제대로 지켜보질 못했던 명인 김덕수. 그가 길 위에서 사는 동안 용훈(37), 동훈(33) 형제가 장성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차남 동훈 씨는 부부에게 4개월 전 귀여운 손주를 안겨줬다. 그 덕에 수십 명의 스텝을 호령하는 그도 집에서는 영락없는 손주 바보 할아버지로 돌변, 틈만 나면 선물을 사다 안기곤 한다는데...

아들들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손주 이찬이를 보여 아낌없이 보상받는 중이다. 평생을 길 위에서 예인으로 살아가느라 어쩔 수 없이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다 하지 못했던 순간이 많았다. 다섯 살 때부터 유랑하느라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그는 타고난 운명 때문에 가족을 꾸리는 것은 사치라고도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하늘이 선물처럼 내려줬다는 ‘가족’은 늘 고마움이자 미안함의 존재. 거장 김덕수가 20점짜리 가장이 된 사연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본다.

▲ 사물놀이 탄생 40주년 기념 연주회 그 뜨거운 현장 속으로~

인생 후반전에 들어선 명인 김덕수는 요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사물놀이 40주년 기념 연주회’를 앞둔 그는 가장 먼저 생전 단짝이었던 故김용배의 묘소를 찾았다. 김덕수와 함께 사물놀이 탄생의 또 한 명의 주역이었던 고인. 30여 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친구의 마지막 길을 붙잡지 못했단 죄책감 때문에 그간 명인 김덕수는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왔다고 한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 듯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은 오빠 김덕수를 위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집밥을 대접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는 사물놀이 탄생 40주년 연주회 무대에 오르는데.... 사물놀이 거장 김덕수가 걸어온 파란만장했던 길과 그의 인생을 기리는 그 뜨거운 무대를 만나본다.

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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