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이철균 경제부장 fusioncj@sedaily.com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관가에서 ‘선 굵은 관료’로 통한다. 곁가지 정책보다 큰 줄기를 제시하며 국가 경제를 이끄는 데 능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9년 2월 이명박 정부의 두 번째 경제수장으로 등판했다. 금융위기 여파로 마이너스 성장 관측이 나돌던 취임 첫해 경제성장률을 0.7%로 막아내며 선방했다. 2010년에는 6.5%, 2011년에는 3.7%의 성장을 이뤄냈다. 2%대 성장이 고착화하는 한국 경제 상황을 윤 전 장관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윤 전 장관은 새해를 맞아 서울경제신문과 여의도 ‘윤(尹)경제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2018년까지 글로벌 경제는 호황이었지만 우리는 이 호황 흐름을 타지 못하고 오히려 경기가 위축됐다”면서 “우리로서는 통렬한 반성과 자성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역설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11월 내놓은 경제 전망에서 세계 경제가 2018년 3.7%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는 이에 크게 못 미치는 2.7%로 예측했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12배나 큰 미국은 2.9%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덩치가 훨씬 큰 미국에 뒤졌던 적은 오일쇼크(1980년)와 외환위기(1998년) 등 손에 꼽힐 정도다.
윤 전 장관은 이러한 성장률 역전 상황에 대해 “우리나라 성장률이 (경제 규모가 훨씬 큰) 미국보다 낮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 경제는 과거 성장기에 인적·물적 투자와 생산성 향상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어우러졌고 그 결과 세계 경제성장률을 웃돌았다”면서 “그래야 신흥국이고 개도국”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후 대대적인 감세 등 기업 기 살리기 정책을 앞세워 성장률을 끌어올린 데 반해 우리나라는 이에 역주행하는 친노동 일변도의 정책으로 글로벌 경기 상승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는 실책을 범했다.
우리 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올해 더 좋지 않다는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에 윤 전 장관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미중 무역갈등이 이어지고 글로벌 주요국의 경기 둔화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성장률 정점을 찍은 미국 △고속성장 한계에 접어든 중국 △저성장하는 일본 △하강 국면인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등 ‘빅4’의 경기 하강 흐름상 수출이 지난해처럼 우리 경제를 받쳐주기 어렵다는 게 윤 전 장관의 판단이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수출과 내수가 함께 돌아가야 하지만 수출 둔화를 내수가 뒷받침하기에는 소비 역시 부진하다.
윤 전 장관은 “세계 경기 흐름이 하강으로 가는 순환적 측면, 그리고 우리 제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는 구조적 측면이 맞물려 올해 경제는 정말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지난해 12월 반도체 수출은 27개월 만에 전년 대비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이의 영향으로 지난해 12월 전체 수출은 -1.2%를 기록했다. 연간 기준으로 역대 최대 수출 기록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징후가 새해 벽두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윤 전 장관은 지금 우리 경제가 당면한 위기는 과거 두 차례 위기(외환·금융)와 양상이 다소 다르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그는 “과거에는 금융에 문제가 생기며 유동성 위기가 왔고, 상대적으로 실물경제는 견조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제조업 등 실물이 먼저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물로부터 위기가 촉발되면 과거 위기 때 오뚝이처럼 딛고 일어섰던 소위 ‘리질리언스 파워(복원력)’가 허물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윤 전 장관은 우리 경제가 이처럼 세계 경제 호황 흐름에서 도태되며 위기 국면으로 치닫게 된 배경으로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 전술을 꼽았다. 성장 엔진인 기업의 ‘투자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린 게 대표적이다. 기업 투자는 고용과 소비를 일으켜 경제를 성장시키는 선순환 구조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과 같은 친노동·반기업 정서가 판치고 기업인이 죄인시되는 분위기에서 어느 기업인이 기업을 하려고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한국은행이 내놓은 올해 1월 전망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2년4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투자 주체인 기업 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는 의미다. 윤 전 장관은 “민간 경제의 중심은 언제나 기업이라는 생각이 중심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친노동으로 기울어 있다”면서 “기업을 적대시하다 보니 민간 경제에서 활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이 사업을 벌이다가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 관리 실패가 용인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도 일침을 가했다. 윤 전 장관은 “정치권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같은 제도를 계속해서 만드는데 비즈니스에는 항상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라면서 “리스크가 현실화해 국가와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징벌적으로 10배·20배 보상하라는데 사업할 기업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공장에서 사고 한번 났다 하면 기업 활동의 긍정적 효과를 부정이 단숨에 도배해버린다”면서 “정부는 기업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패는 고사하고 잡혀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게 지금 기업인들의 분위기”라고 윤 전 장관은 전했다.
그는 정부의 일자리정책도 강하게 비판했다. 일자리를 늘리겠다면서 구사하는 전략이 한결같이 일자리를 없애는 효과만 내고 있다는 취지다. 윤 전 장관은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목표 설정이 중요한데,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정책 목표로 삼은 것은 잘했다”면서도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술전략 측면에서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트레이드 마크인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주52시간제 도입 등 이른바 ‘일자리 3종 세트’가 일자리 확대라는 정책 목표와는 전혀 들어맞지 않다고 일갈했다. 오히려 “정치권이 앞장서서 노동구조 개혁에 힘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지금 정책은 소위 좋은 직장을 가진 기존 근로자를 위한 대책일 뿐”이라며 “취약계층 근로자와 근로시장에 아예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철퇴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정책 취지와 달리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근로장려세제(EITC) 지급 대상 확대, 6세 미만의 모든 아동에게 수당 지급 등 정부의 급격한 복지 확대와 관련해서도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윤 전 장관은 “정부는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기 때문에 복지 확대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복지는 성장의 결과다. 경제가 성장해서 소득이 늘지 않으면 복지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 성장은 도외시한 채 행해지는 포퓰리즘적 보편 복지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선진국의 복지 수준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일부 복지 확대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윤 전 장관은 “1년 총지출 예산 중에서 복지 예산 비중을 떼어놓고 보면 우리가 북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낮은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그들 국가와는 성장과 복지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윤 전 장관이 특히 걱정하는 부분은 복지 확대 속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사회 진입으로 복지 혜택을 제공해야 할 대상이 급격히 불어나는 데 더해 기존 복지의 확대 속도까지 너무 빠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올해 보건복지부 예산은 지난해보다 14.7% 늘어난 72조5,148억원으로, 증가율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10년 만에 최대인 전체 예산 증가폭(9.5%)보다 크다. 한번 확대하면 되돌리기 어려워 경직성 예산으로 불리는 복지 의무지출도 올해 처음 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추세라면 오는 2022년 141조6,000억원까지 불어날 것이라는 게 국책연구기관의 전망이다.
윤 전 장관은 작심한 듯 “포퓰리즘 복지를 하더라도 고민을 하면서 하라”고 강하게 주문했다. 그는 “복지 수혜자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생산적 복지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혜택을 주는 맞춤형 복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관까지 지낸 자신이 65세 이상이라는 이유로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것은 맞춤형 복지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소개했다. 윤 전 장관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자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복지는 결국 선별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서는 “전부 수요규제 차원에서 접근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보유세 인상, 공시가격 현실화, 대출규제 등 지금까지 나온 대책들은 모두 수요를 잡겠다는 것”이라면서 “공급 확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리=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