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블랙리스트’ 공작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최윤수 전 국정원 2차장이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공모해 공직자를 불법사찰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무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김연학 부장판사)는 3일 국정원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최 전 차장에게 징역 8개월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 전 차장이 받은 ‘핵심 혐의’인 공직자 불법사찰 공모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혐의는 추명호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공직자를 뒷조사한 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이를 승인했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당시 국정원의 사찰 대상자 중에는 우 전 수석을 감찰한 이석수 전 청와대 특별감찰관도 포함됐다.
검사장 출신인 최 전 차장은 우 전 수석과 서울대 법대 84학번 동기이자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당시 최 전 차장이 우 전 수석과 수 차례 통화한 사실 등으로 미뤄, 우 전 수석과 추 전 국장의 사찰 범행을 알고 있었으리라는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공범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우 전 수석과 다수 통화하긴 했으나 개인적 친분이 있어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 전 수석에게 보고되도록 승인한 보고서 내용만으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에 대한 동향 수집 범위나 방법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다만 재판부는 최 전 차장이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분류되던 문화예술인들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공작’에 관여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직원들로부터 배제 대상자를 선정해 명단을 문체부에 통보하는 업무의 중단을 건의받았음에도 계속 위법한 일을 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보고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블랙리스트 사업은 객관적이어야 할 집행 권한을 정부 비판 억제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자유민주주의 기본 정신을 해친 것”이라며 “법률 전문가로서 위법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제지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심의에 부당 개입한 혐의에 대해서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문체부 공무원들과 공모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한편 이에 앞서 우병우 전 수석은 공직자에 대한 불법사찰 혐의로 지난해 12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우 전 수석은 구속기한 만료로 이날 새벽 석방됐다. 최 전 차장과 우 전 수석 사이에서 불법사찰과 정치공작을 주도적으로 실행한 혐의로 기소된 추명호 전 국장은 이날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재판부는 추 전 국장이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과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을 불법 사찰한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했다. 최 전 차장은 선고 직후 “검찰이 4가지 공소사실로 기소했는데 재판부에서 그 중 3가지를 무죄, 한 가지를 유죄로 선고했다”며 “그(유죄) 부분은 제가 부임하기 전부터 직원들이 수행해 온 업무이고 재판부 판단과는 달리 제가 중단 건의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최 전 차장은 이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을 다시 받아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최 전 차장은 이날 자정 우 전 수석이 석방되고, 추 전 국장은 법정에서 구속된 데 대한 심경을 묻자 “그 부분은 모든 재판 절차가 종결되면 그때가서 말씀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윤서영 인턴기자 beatr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