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김석동이 풀어내는 한민족의 기원] 칭기즈칸 탄생지서 '대몽골제국 서막'을 떠올리다

<2> '기마군단 근원지' 몽골 고원의 자연과 역사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필자인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김석동이 풀어내는 한민족의 기원 손서체2


필자는 기마군단 역사의 근원지인 몽골고원을 계절별로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다. 올 1월에도 계획이 잡혀 있다.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 곳곳에서 보이는 흡사한 풍습, 한국인들을 가깝게 생각하는 정서, 남겨진 유물과 유적에서 나타나는 우리와의 연관성…. 그뿐이랴. 손님을 접대하는 따뜻한 마음,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 무리,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초원 등 몽골고원은 우리를 언제라도 실망시키지 않을 여행지다.






0915A37 헨티주2


광활한 몽골고원의 겨울 모습이다. 서로는 알타이산맥, 동으로는 대싱안링산맥, 남으로는 고비사막, 북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는 준평원 몽골은 해발 평균 1500미터다. 중앙·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넓은 초원지대가 형성돼 있지만 여름 40도 겨울 영하 40도의 냉혹한 기후를 견뎌내야한다. 용감하고 영리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것이다.광활한 몽골고원의 겨울 모습이다. 서로는 알타이산맥, 동으로는 대싱안링산맥, 남으로는 고비사막, 북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는 준평원 몽골은 해발 평균 1500미터다. 중앙·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넓은 초원지대가 형성돼 있지만 여름 40도 겨울 영하 40도의 냉혹한 기후를 견뎌내야한다. 용감하고 영리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것이다.


◇몽골고원의 자연과 유적지=몽골고원은 동으로 대싱안링산맥, 서로 알타이산맥, 남으로 고비사막, 북으로 바이칼호수에 이르는 면적 272만㎢(우리나라의 약 27배), 평균 해발고도 1.5㎞의 광활한 고원지대다. 이 땅은 몽골공화국(156만㎢)과 중국의 내몽골자치구(118만㎢)에 대부분 속해 있으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준평원 지역이다. 남부에는 고비사막이 있으나 중앙·동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가축을 방목하는 넓은 초원 지대가 있다.

몽골고원은 40도 가까이 올라가는 여름과 영하 40도 이하까지 내려가는 겨울이 교차한다. 올 1월1일 새벽 울란바토르의 기온을 봤더니 영하 36도, 체감온도는 영하 46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또 연간 강수량도 350㎜ 정도로 매우 적다. 이처럼 기후조건이나 생태환경이 열악해 사람들이 살기에 결코 녹록지 않다. 이런 엄격한 자연환경에서 용감한 동시에 영리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았는데 바로 기마유목민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 몽골고원에서 유라시아 대초원의 주인공 기마군단이 출현해 2,500년간 세계사를 써내려갔다.

몽골공화국은 카자흐스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내륙국이나 인구는 307만명에 불과하다.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17세기부터 라마교의 본산이었고 18세기에는 러시아·청과의 중계무역지로 번창했다. 울란바토르 인구는 105만명으로 전 국민의 3분의1이 수도에 사는 셈이다. 이 도시는 냄비 모양으로 생긴 큰 분지인데 가을·겨울에는 난방용으로 갈탄을 때기 때문에 매연으로 엄청 고통스럽다. 해마다 나아지고는 있으나 건물 안팎을 막론하고 가슴이 막히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시내에는 민족독립의 영웅 ‘담디니 수흐바토르’를 기념하는 광장을 중심으로 정부청사, 독립영웅들의 묘, 극장, 호텔 등이 늘어서 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몽골 국립중앙박물관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흉노·선비·돌궐·몽골·여진 때의 귀중한 유물들이 시대에 따라 전시돼 있다. 몽골을 방문할 때마다 들르는 곳이다.

울란바토르에서 교외로 나가면 바로 대초원이 전개되는데 동북쪽으로 약 70㎞ 떨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테를지국립공원이 있다. 바다가 융기해 산과 언덕·숲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곳으로 트레킹·낚시·승마·골프 등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어 열악한 울란바토르의 생활환경을 보완하고 있다.

몽골 땅에는 기마유목민들의 삶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수많은 무덤과 유적, 고대로부터 내려온 200여곳의 암각화들이 문명의 이동과 교류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르혼계곡의 문화경관, 우브스분지, 알타이 지역의 암각화, 지금은 적막한 땅이 돼버렸으나 원나라 초기 30년간 수도였던 카라코룸(하라호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몽골 북동쪽에는 헨티주가 있는데 러시아와의 경계 지역에 ‘다달솜’이라는 군이 있다. 바로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웬만한 물속과 갯벌을 지날 수 있는 특수 레저용 차량(RV)으로 울란바토르에서 18시간을 달렸다. 차량 고장이나 사고에 대비해 두 대가 같이 다녔다. 툴강·헤를렌강·오논강을 지나 칭기즈칸 탄생지에 다다랐다. 몽골 사람들도 찾기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작은 돌무지와 푸른 깃발만 있는 탄생지, 탄생 800년 만에 세워진 대형 비석, 칭기즈칸과 자무카가 운명의 일전을 벌인 ‘달란 발주트 평원’을 보면서 대몽골제국 역사의 서막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칭기즈칸 탄생 기념비.칭기즈칸 탄생 기념비.


기마군단이 호령했던 역사현장

기후조건·생태환경 열악한 환경속

5부족이 나눠 지배하던 몽골고원

칭기즈칸, 세계최대제국으로 건설




◇몽골고원의 역사=몽골고원은 기마유목민들의 본거지이자 기마군단의 요람이었고 고대로부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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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등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후 몽골에서 일어난 고대 국가를 흉노, 선비, 유연, 튀르크(돌궐), 위구르, 키르기스, 거란 등의 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2,500년간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활약한 기마유목민족과 국가를 보면 ‘흉노(→훈)’ ‘선비(→유연→거란)’ ‘돌궐(→위구르→셀주크제국→오스만제국)’ ‘몽골(티무르→무굴)’ ‘여진(→금→청)’으로 요약된다. 이들은 바로 이 몽골고원과 만주·중앙아시아를 주 무대로 해 광활한 지역으로 무대를 넓혀나갔다.

몽골고원에서는 10~11세기 많은 부족 연합체가 형성됐고 11~12세기에는 타타르·케레이트·나이만·메르키트·몽골족의 5부족이 몽골고원을 나눠 지배했다. 이 가운데 작은 부족인 몽골족에서 칭기즈칸이라는 영걸이 나타나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1206년 대몽골국을 세웠다. 몽골은 금나라·호라즘·탕구트를 정복하고 13세기에는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를 정복·통치하는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해 ‘팍스 몽골리카’를 실현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300년간의 청나라 지배와 러시아 영향력하에 있던 시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재조명을 받았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WP)는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난 1,000년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대몽골제국의 세계 통치가 끝나면서 몽골인들은 고향인 몽골고원으로 돌아왔으나 18세기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20세기 들어 외몽골과 내몽골의 운명은 갈라지게 된다. 외몽골 지역에는 사회주의 몽골공화국이 세워졌으나 내몽골 지역은 청나라의 지배에 이어 오늘날까지 중국 영토로 이어지고 있다.

필자 김석동(오른쪽 세번째)이 몽골 현지의 게르에서 주민들의 환대를 받고 있다.필자 김석동(오른쪽 세번째)이 몽골 현지의 게르에서 주민들의 환대를 받고 있다.


몽골인-한국인의 연결고리

몽골제국시대에 고려왕실과 혼사

신석기시대 북방라인과 직접연계

칭기즈칸 ‘고주몽 후예’ 밝혀지기도



◇닮은 사람들, 몽골인-한국인=북방 기마군단은 오랜 과거부터 한민족과의 연결고리를 가져왔다. 특히 몽골은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과거부터 한민족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몽골과 한국은 정서적으로 공통분모가 많을 뿐 아니라 유적·유물은 물론 언어, 생활관습, 문화, 생각하는 방식, DNA와 몽고반점 등 곳곳에서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예로 몽골은 우리와 같이 아이가 태어나면 한 살이다. 한국의 나이 개념인데 이는 태아를 이미 인격적으로 봐 나이를 부여하는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몽골제국 시대에 몽골군은 세계를 정복하면서 대적하는 적국을 순식간에 초토화하는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유독 고려에 대해서는 3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쟁과 회유를 계속했고 전후에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제지국이 됐다. 또 원나라 황실의 공주를 고려 국왕에게 시집보내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그래서 사위의 나라라고 해서 부마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가 공주를 시집보내거나 볼모로 보낸다.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몽골·고려는 판이한 사례다. 승전국이 공주를 시집보낸 것이다. 또 고려는 다른 점령지와 다르게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배경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먼 한민족의 이동사에서도 연결고리를 볼 수 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신석기시대 알타이-몽골-대싱안링-아무르강-만주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라인과 직접 연계돼 있으며 한국과 몽골은 동아시아 지역 청동기 문명의 주역으로 청동기 유적의 분포는 한민족의 이동로인 즐문토기인의 이동로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또 몽골 북부 바이칼호수의 부랴트족의 일파가 이동해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가 됐다는 연구도 있다.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몽골인은 4만6,000명(전체 외국인 213만명의 2.2%)으로 몽골 전체 인구의 1.5% 가까이가 한국에 와 있다. 예로부터 몽골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했고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불렀다. 솔롱고는 무지개를 뜻한다.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의 저자인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에 따라 칭기즈칸은 고구려 건국자 고주몽의 후예로 밝혀졌다. 고주몽의 후손인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9대손이 모든 몽골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알란고아’이며 그 10대손이 칭기즈칸이라고 한다. 앞으로 한·몽골 관계의 역사적 실체가 더 밝혀지는 연구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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