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기반 분석 헬스케어 브랜드인 마이지놈박스는 개인 의뢰인의 유전체를 분석해 발병 가능성 등을 맞춤 진단한다. 값비싼 병원 검사를 받지 않고도 타액 수집 등 간단한 작업만으로 사전에 건강을 챙길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업체의 쾌거임에도 이 업체는 영문서비스만 제공하고 있다. 국내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도 서비스를 찾을 수 없다. 마이지놈박스가 국내 규제를 피해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어서다. 국내에서 소비자직접의뢰(DTC) 유전자 검사는 규제 때문에 탈모와 피부노화 등 12개 항목만 가능한 반면 미국·일본 등 과학기술 선진국에서는 제한 없이 가능하다.
바이오 같은 신산업뿐 아니라 기존 산업들도 수도권 규제 등으로 미래 투자의 발목이 잡혀 있다. 경기도 이천에서 간장을 만들고 있는 샘표식품은 16년째 공장 증설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공장에서 규격화된 과정을 거치기는 하나 옛 가정식 발효과정을 고집하는 샘표식품의 간장 항아리 보관도 공장 규제를 받는다. 이천이 수도권에 속한다는 이유로 간장을 더 만들지 못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지난 2015년 한국경제연구원이 수도권 투자 의사를 보인 118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관련 규제 때문에 계획을 철회한 기업이 28개에 달했다.
◇창업 싹 자르는 규제…해외로 산업 ‘엑소더스’=과거 앞을 내다본 정책들 덕에 산업강국으로 발돋움했던 한국이 이제는 산업의 무덤이 되고 있다.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세계적 정보기술(IT) 강국이 된 시절도 옛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역이 될 신산업들도 마찬가지다. 과거 국가발전을 주도했던 관료들이 오히려 4차 산업혁명 시대 민간 추격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관료주의와 규제로 사업 아이템과 아이디어가 사장(死藏)될 위기에 처한 스타트업들은 앞다퉈 한국을 등지고 있다.
중국에서 식품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했던 A씨는 귀국한 뒤 창업할 계획이었지만 준비단계에서 생각을 접었다. 각종 법규 때문에 당초 구상을 수정해가며 준비를 이어갔지만 규정이 너무 복잡해 서류작업으로 날을 새기 일쑤였다. A씨는 “중국에서 사업할 때 사드 보복 당시 차별을 겪었던 것 빼고는 규제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다”며 “한국에서 창업을 강행했다가는 문을 열더라도 사업이 잘 안 될 것 같아 취업을 택했다”고 했다.
서승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가 10년간 연구한 끝에 내놓은 자율주행차 ‘스누버’는 한국이 아닌 실리콘밸리를 누비고 있다. 한국에서 교수 창업을 하고 싶었지만 각종 규제에 짓눌렸다. 자율주행차 관련 법규가 아예 정비되지도 않은데다 카풀 서비스와 택시 업계 간 갈등에서 본 것처럼 기본적 차량공유조차 발을 떼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율주행차는 언감생심이었다. 서 교수는 결국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를 설립했고 지난해 말 자율주행 택배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2018년 세계 경쟁력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의 ‘정부 규제에 따른 부담(burden of government regulation)’ 순위는 140개국 중 79위를 기록했다. 전체 국가경쟁력이 15위로 비교적 높은 점을 고려하면 정부 규제가 한국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 규제가 가장 적은 나라(1위)는 싱가포르였고 미국 4위, 독일 7위, 중국 18위였다. 대만과 일본이 각각 31위와 32위를 차지했고 한국의 앞과 뒤는 칠레(78위)와 자메이카(80위)였다.
이 같은 과도한 규제는 4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의 정체로 이어지고 있다. 한경연이 인공지능(AI), 바이오, 사물인터넷, 우주기술, 로봇 등 12가지 4차 산업 분야의 국가별 기술 수준을 비교한 결과 2018년 한국을 100으로 봤을 때 중국 108, 일본 117, 미국은 130으로 나타났다. 5년 후 전망도 녹록지 않다. 같은 기관에서 한 5년 후 예측에서도 중국 113, 일본 113, 미국 123으로 나타나 격차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됐다.
◇규제는 관료 ‘무기’…근본적 해결 모색해야=정부도 17일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시행하는 등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현장은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지만 지켜봐야 한다’는 분위기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도 ‘전봇대’를 뽑겠다고 했고 박근혜 정부 때도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며 “지난 정부처럼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 같은 제도 시행도 중요하지만 규제가 관료들이 포기하기 어려운 기득권이자 ‘무기’라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정부에서 차관급 기관장을 지낸 한 인사는 “관료들의 힘은 규제와 예산에서 나오는데 아무런 인센티브나 강제성 없이 규제가 혁파될 것으로 보는 것은 순진한 일”이라며 “교수 등 비관료 출신 장관이 규제 개혁을 시도하면 오히려 관료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결국 관료들의 요구대로 움직이게 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 2009년부터 2016년까지 행정부에서 신설되거나 강화된 규제는 9,715건에 달했다. 이 중 837건만 철회나 개선 권고가 이뤄졌다. 8,878건, 연평균 1,110건의 규제가 신설되거나 강화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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