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동요의 아름다움, 어른들의 마음을 녹이다

작가

어린시절 멋모르고 듣던 동요엔

손에 잡힐듯 상상의 세계 펼쳐져

어른들 위한 '사유의 재료'이자

예술·창조성의 원동력으로 작용




얼마 전 핑크퐁(캐릭터 앱)의 ‘아기 상어’라는 동요가 빌보드 차트에 3주째 연속 진입해 화제가 되었다. 그 노래를 들어보면서, 우리 어릴 적의 동요들이 생각났다. ‘아기 상어’처럼 중독성 있는 멜로디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에 들었던 동요들은 가사마다 절실한 사연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치 ‘머리’가 아니라 ‘세포’에 저장돼 있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불러도 가사가 생생히 기억나는 동요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섬집아기’의 가사가 갑자기 떠오른 계기는 동생부부가 집을 비운 동안 어린 조카를 봐주면서 ‘잠들지 않는 아기를 재우는 최고의 노래’를 고민하면서부터였다. 엄마 보고 싶다고 칭얼대던 조카가 이 노래를 두 번 불러주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놀라운 속도로 잠들었다.


‘어린 시절에 듣던 노래’를 어른이 되어 내가 ‘다시 부르는 노래’가 되었을 때, 똑같은 노래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뭔지 몰라도 왠지 슬픈 노래’로 기억됐던 그 노래가 어른이 되니 ‘그 슬픔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은, 공감과 이해의 노래’로 바뀌었다.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굴 따러 간 사이, 아기 혼자 집을 보며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엄마의 팔이 아닌 자신의 팔을 베고 잠이 드는 아기라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기를 혼자 집에 두고 나갔을 엄마의 마음, 엄마가 보고 싶어 하루 종일 울다 지쳐 잠드는 아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2절은 더욱 슬프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1절이 ‘아기의 시선’에서 엄마없이 홀로 보내는 하루의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드러낸다면, 2절은 ‘엄마의 시선’에서 홀로 남겨진 아기를 걱정하는 마음과 마침내 ‘다 못찬 굴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마음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사랑하는 아기 생각에 갈매기 울음소리만 들어도 맘이 설레고, 굴바구니가 다 못 차서 생계에 대한 걱정이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려도, 무거운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마치 누가 다급한 마음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랫길을 달려오는 엄마의 마음. 어른이 되니 미처 다 기억하지 못했던 ‘동요의 2절’이 더욱 아름답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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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장 슬펐던 동요 중 하나는 ‘따오기’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동요 테이프를 매일 듣고 자랐는데, 그 테이프 속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바로 <따오기>였다. 새의 울음소리 속에서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의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하는 노래 가사는 지금 들으니 더욱 구슬프다.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나라 해 돋는 나라” 어린 마음에도 그 노래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감성이 묻어 있는 노래로 들렸다. ‘동요의 2절’은 여지없이 더욱 슬프다. “잡힐듯이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내 아버지 가신나라 해 돋는 나라.” 이 슬픈 동요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의 그 막막한 세계, 천애고아가 된 듯한 그 쓸쓸한 세계를 미리 보여주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따오기’는 단지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얼마나 슬플까’라는 상상을 뛰어넘어, 보일 듯 보일 듯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왜 나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일까. 왜 나는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것일까. 바로 그것이야말로 ‘상상력’의 존재 이유, ‘창조성’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 속에 각인되는 동요의 힘. 그것은 감동을 통한 반복과 자연스러운 암기를 통해 늘 마음 속에 ‘생각할 거리’ ‘사유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동요가 단지 어린 시절의 추억에 그치지 않고 어른들의 행복한 ‘사유의 재료’가 될 수도 있으니, 아이들에게 더 많은 동요를 ‘미래의 자산’으로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아도, 잡히지 않아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 마음 속 상상의 세계를 끝까지 추구하고, 그려내고, 만들어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예술의 원동력이고, 과학의 힘이며, 문화의 진취성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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