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8월 서울고등법원.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쪽으로 성을 바꾼 이모(당시 29세)씨가 “종중(宗中)의 일원으로 인정해달라”며 종중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2심 재판부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해당 종중은 “종중은 본질적으로 부계혈족을 전제로 하는 종족단체”라고 맞섰지만 법원은 “모계혈족을 선택해 성이 다른 자녀라도 종원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재판장을 맡았던 노정희 부장판사는 이 판결을 커리어 대표 판결로 남기며 지난해 8월 대법관에 취임했다. 남성 중심의 씨족관계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확연히 달라진 대표 사례다.
종중이란 공동 선조의 분묘 수호와 제사·친족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는 혈족을 의미한다. 농경을 근간으로 한 씨족사회의 잔재다. 선산 등 이들이 소유한 종중 재산에 대한 배분은 대체로 종원들의 의사를 통해 결정된다.
근래까지 이 종원들의 자격은 ‘선조의 후손이면서 성년인 남성’에 한정됐다. 대부분의 가문이 종중 권리 측면에서 여성은 자연적으로 종원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혈족이 아닌 사람과 동일시했다.
이 같은 관습이 한반도에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한국학의 대가로 꼽히는 마크 피터슨 미국 브리검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 남녀 차별 없이 균분 상속을 했고 족보에도 아들·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다. 이 때문에 부계 못지 않게 모계 혈통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종중 내 남녀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진 것은 불과 300여 년 전부터다. 17세기 이른바 ‘주자가례’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질서가 널리 퍼지면서 남녀를 구분하는 강력한 규범이 자리 잡았다. 우리가 ‘오랑캐’ 취급하던 여진족이 중원을 제패하고 청나라를 세우면서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대두했고 이는 곧 남녀 불평등을 키우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 교조적으로 변한 유교적 관습으로 최근까지도 여성들은 뒤에서 음식만 장만할 뿐 제사 때는 아들과 친손들의 제례의식을 물끄러미 바라만 봐야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이 급증하며 종중 내 남녀차별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변질된 종중 관습에 균열이 지속되자 사법 영역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고유의 전통처럼 변질된 종중 관습에 처음 균열을 가한 것은 호주제에 대한 2005년 2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이었다. 이후 같은 해 7월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례가 나오면서 딸들의 권리에 대한 논쟁도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용인 이씨 사맹공파 출가 여성 5명과 청송 심씨 혜령공파 출가 여성 3명이 “여성이 종중 구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산을 차등 분배한 것은 남녀 차별”이라며 낸 소송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관습의 손을 들어준 1·2심 판결을 파기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1970년대 이래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남녀평등 의식이 넓게 확산되는 등 가족생활과 제사문화 등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됐다”며 “부모에 대한 부양에 있어서도 아들과 딸 역할에 차이가 없게 됐고 핵가족 확산 등에 따라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더 이상 특이한 일로 인식되지 않게 됐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나아가 2010년 “종중 소유 토지를 임의로 팔았다”며 일부 종중원을 상대로 낸 사해행위 취소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여성도 종중 최고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종중총회 소집권을 가지는 연고항존자(항렬이 가장 높고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는 여성을 포함한 전체 종중원 중 항렬이 가장 높고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같은 해 종중 재산을 여성에게 남성의 30%만 분배한 것에 대한 소송에 대해서도 ”단순히 남녀 성별의 구분에 따라 분배 비율에 차이를 두는 것은 정당성과 합리성이 없어 무효“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법원의 판단일뿐 여전히 사회 저변에는 상속과 제례에 있어 남녀 구별을 두는 문화가 넓게 퍼져 있어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