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조업 서플라이체인의 구조적 변화는 대표적 자동차 기업인 도요타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도요타는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시장 변화를 독자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지난 2016년부터 종전의 수직 통합 모델 대신 국적·업종·경쟁사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협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수소차 개발에 집중하느라 전기차(EV)에 소홀했던 도요타는 지난해 덴소·아이신정기·다이하쓰·스바루 등 계열사들과 함께 전기차 연합을 구축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세계 최대 배터리 업체인 파나소닉과 배터리 공동 생산을 위한 합작사 설립도 발표했다. 과거와 같은 수직적 종속 거래로는 대기업과 협력사에 모두 부담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도요타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 데까지는 정부의 후방지원도 한몫했다. 일본은 이미 10여년 전인 2006년부터 ‘융합 시대’에 대비해 중소기업과의 협업을 촉진하기 위한 ‘신협업법’을 제정하고 ‘일본 혁신 네트워크(Japan Innovation Network)’를 구축했다. 서로 다른 업종의 사업자들이 유기적으로 제휴를 맺고 신수요를 창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내용이다. 전략적 제휴로 신사업에 진출할 경우 정부가 최대 3억원의 보조금과 설비투자 세액공제, 저금리의 융자, 신용보증 특례 등의 혜택을 주기도 했다. 해당 프로젝트가 시행된 첫해만 3,000여건의 협업 관련 상담이 이뤄졌고 그중 118개가 사업화됐다.
협력업체들의 자립 움직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정밀기기를 제조하는 오리온사의 경우 높은 수준의 제품개발 능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자립화가 이뤄지지 않아 한동안 대기업인 야스카와사의 하청기업으로 존속돼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오리온은 야스카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다수 거래처와 전략적 파트너를 적극적으로 맺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청기업이 자립형으로 거듭날 수 있는 데도 일본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해외 기업이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에서도 일본 부품업체가 일정 부분 참가해 자재 공급에 나서고자 한다면 저금리로 관련 자금을 대출해준다. 해외 기업이 최종 제품을 조립하더라도 전체 지불 대금에서 일본산 부품이 차지하는 값이 30% 이상이라면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일본 협력기업이 자국 원청기업에 묶여 있기보다 세계 다방면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다.
산업연구원은 “현재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 기업들은 거래기업 수를 다변화하는 등 ‘확장형 공급망(extended supply chain)’을 채택하고 있다”며 “산업 간 경계가 불투명해지고 기술 융합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수직적·종속적 거래관계를 이어간다면 협력업체가 성장할 수 없고 이는 결국 대기업에도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