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인도·태국 왕들은 눈엣가시인 신하를 골라 흰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한다. 왕이 내린 하사품을 잘 못 돌보다가는 대역죄로 경을 칠 터. 하지만 수명이 길고 많이 먹는 코끼리를 제대로 돌보다가는 재력을 탕진하기 딱 알맞다. 신하 입장에서는 고약한 징벌이지만 통치자로서는 신의 한 수다. 고대 설화에서 유래한 흰 코끼리는 현대에 들어 겉보기에는 좋지만 실속 없는 애물단지라는 의미로 통한다.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국책 사업이 그 짝이다.
흰 코끼리 스토리는 지난해 11월 방영된 KBS ‘명견만리(저신뢰 사회의 경고)’에서 소개돼 제법 널리 알려졌다. 국책 사업이 흰 코끼리로 전락하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부터 무너진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덴마크가 세금 부담이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국민 행복도가 높은 것도 자신이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인다는 사회적 믿음 때문이라는 지적은 커다란 공감을 얻었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불신의 골이 깊은데다 주변에 흰 코끼리가 너무나 많아서일 것이다.
애물단지 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다. 영국 정론지 가디언으로부터 세계 10대 흰 코끼리라는 불명예를 안은 4대강 사업이나 활주로에 고추를 말렸다는 무안공항 등이 대표적이다. 매년 100억원 넘는 적자에 허덕이는 공항만도 4곳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공항이라고 비아냥 받은 양양국제공항도 또 어떻고. 평창동계올림픽의 주요 무대는 대회 개최 1년이 지났건만 사용 후 계획이 없어 곳곳에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시설 관리 비용만 연간 100억원이 넘는다는 보고서도 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어어 하다’ 얼렁뚱땅 넘어갔다. 정부가 설 연휴를 앞두고 전격 발표한 24조원 규모의 예비타당성 면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책 견제와 검증은 부실했다. 야당부터 대충 눈을 감았다. 지역구 민원을 들어준다는 데 목청을 높일 턱이 없었던 게다.
일괄 예타 면제는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추진 속도가 너무 빨랐다. 정부가 예타 면제를 공식 석상에서 처음 꺼내 든 것은 지난해 10월24일이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혁신성장과 일자리지원 방안을 발표하면서 주요 사회간접자본(SOC)사업에 대한 예타 면제를 시사했다. 정부가 운을 떼고 면제 프로젝트를 발표하기까지 딱 3개월 걸렸다. 방송에서 소개된 프랑스의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 같은 국책사업 부실예방 시스템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이런 과속은 절차적 정당성을 그토록 앞세운 정부가 맞나 싶다. 나름 선정 기준을 제시했으나 모호하기만 하다. 지역균형 발전의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다.
수혜 지역과 소외 지역의 갈등 소지도 다분하다. 시민·환경단체들이 못 키우겠다며 흰 코끼리 거부운동이라도 벌인다면 사회적 갈등은 증폭될 게 뻔하다. 예타 일괄 면제는 비단 예산 낭비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부와 국민의 신뢰를 깨뜨리고 정책 불신을 낳는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독서광인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일독을 권한 책 ‘명견만리’에서 세계적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은 사회발전의 필수 요소로 갈등관리 능력을 꼽으면서 그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사회 갈등은 불확실성을 높여 생산적인 경제 행위를 억제하고 경제 행위에 써야 할 자원을 분산시킨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대규모 국책사업은 타당성을 따져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 했다. 이명박 정부를 ‘토건정부’로 그토록 비판한 게 또 누구인가. 그런데도 적폐로 지목한 MB 정책을 답습하고 있으니 J노믹스의 밑천이 다 드러났다는 말로 들린다. 경제 철학과 상상력의 빈곤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임기 중 화려한 착공식을 갖겠다는 욕심까지 낸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살이 너무 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흰 코끼리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나마 시급성과 경제성을 따져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만이 국민의 부담을 덜 지우는 길이다./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