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건물과 당당하게 내걸린 명품 간판, 도로를 오가는 고가의 자동차…
일본의 대표 번화가 ‘긴자(銀座)’는 많은 이들에게 ‘명품 거리’, ‘비싼 동네’라는 이미지로 익숙하다. ‘은화를 만드는 거리’라는 의미에 걸맞게 이곳에서는 고급 백화점과 면세점, 유명 브랜드의 매장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이름 대면 알 법한, 값 들으면 입 벌어질 매장들이 많다는 것 하나로는 그러나 이 세계적인 관광지를 설명할 수 없다. ‘명소’로서의 긴자가 존재할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100년 넘게 상인 정신을 이어오며 그 뚝심으로 고객을 끌어들인 노포(老鋪)들이다.
긴자의 외관은 ‘휘황찬란’이라는 표현이 떠오를 만큼 화려하기 그지없다. 고개 들면 사방에 보이는 게 (사지는 못해도) 눈과 귀에 익숙한 유명 로고들이다. 숨을 돌리고 거리를 찬찬히 뜯어봐야 비로소 ‘또 다른 긴자’가 눈에 들어온다. 소박한 간판 위엔 ‘Since 1885’, ‘1870’ 같은 내공이 느껴지는 숫자가 박혀 있다. 양복점, 안경점, 텐동 전문점, 빵집, 찻집… 스스로가 긴자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이들 가게는 이 거리의 온갖 풍파를 겪으며 묵묵히 제 길을 걷고 있다.
물론 오래됐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들 점포들의 경쟁력을 설명할 수는 없다. 유행에 민감하고 자본력으로 무장한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서, 이들 노포들이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일까.
이들의 저력은 몇몇 점포에서 받아볼 수 있는 작은 책자에서 찾을 수 있다. ‘긴자백점(銀座百点)’이라는 이름의 이 책자는 긴자에서 운영 중인 노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백점회’에서 만드는 월간지다. 1955년 4월 25일 인가를 받았고, 지금까지 772호째 찍었다고. 참고로 백점회는 100년 넘은 점포 100곳이 모여 만든 모임이라는 의미였지만, 가입 매장이 100곳이 넘었다고 한다. 1954년 구성된 백점회는 ‘작은 점포들도 뭉치면 살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줬다. 월간지 ‘긴자백점’의 겉모습은 한국의 배달음식 전단지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수준 높은 콘텐츠에 감탄하게 된다. 가장 최근호인 3월호에는 긴자에서 활약하는 여성 3인방(마츠야 백화점 본점장, 미즈호 은행 긴자지점장, 소방서 긴자출장소장) 대담과 사회학자가 쓴 ‘장소의 브랜드 능력’에 대한 글, 시대극 연구학자가 전하는 긴자 상점과 얽힌 추억(에세이) 등이 담겼다. 이전 호에서는 그림책 작가로 유명한 와다 마코토가 ‘긴자, 두근두근한 날들’이라는 연재물 필진으로 참여한 바 있다.
백점회, 긴자백점의 저력은 여기서 발휘된다. 대기업의 대대적인 마케팅을 작은 점포들이 일일이 대응하며 당해낼 리는 만무하다. 영세한 업소가 독자적으로 유명 잡지에 손바닥, 아니 손바닥의 3분의 1만큼만 광고를 할 수 있을까. TV 광고? 잘 나가는 모델? 애초 싸움이 안 되는 경쟁이다. (물론 백점회 소속 가게가 모두 영세한 것은 아니다. 옷 한 벌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양복점을 비롯해 고가의 상품을 파는 곳들도 많다.) 수준 높은 콘텐츠를 전달하며 그 안에 긴자가 자연스레 녹아들게 하는 긴자백점은 노포들의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다. 이 전략은 노포들의 연대가 창출해 낸 저력이다.
긴자백점은 가맹 점포에서 무료로 받아볼 수 있지만, 권당 270엔(소비세 포함)에 별도 판매(구독)하는 유료잡지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표지와 수록된 상점 지도 때문에 관광객들도 기념품처럼 챙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긴자의 큰 특징은 다양한 점포가 위화감 없이 혼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비싼 가게와 서민적인 가게가 함께 하는, 이면성(二面性)이 재밌는 거리죠.” 긴자백점 3월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위화감 없는 혼재, 이면성… 독특한 공존과 그것을 가능케 한 영세 상인들의 의기투합. 이것이야말로 ‘세계적인 관광·쇼핑 거리’를 만들어낸 ‘긴자다움’이 아닐까.
/도쿄=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송주희는 서울경제신문 기자로 현재 일본 게이오대에서 연수 중이다. 가깝지만 먼, 비슷하지만 다른 나라 일본. 이곳의 사람들과 문화를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