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4년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 있던 불교 경판을 가져간 미군이 65년 만에 유물을 반환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설악산 신흥사는 지난 18일 미국 시애틀에서 미군 출신 리처드 록웰(92) 씨로부터 ‘제반문’(諸般文) 목판 중 마지막 부분 1점을 돌려받았다고 26일 밝혔다.
미군 해병대에서 복무한 록웰은 중위 시절이던 1954년 10월 수색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흥사에 들렀다.
전쟁으로 황폐화한 신흥사 경내 파괴된 전각 주변에서 경판 1점을 수습한 그는 그해 11월 경판을 들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신흥사 경판이 중요한 문화재라고 판단한 록웰은 유물을 한국에 돌려주고자 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던 차에 지난해 1월 속초시립박물관에 자신이 한국에 장교로 머물 때인 1953∼1954년에 촬영한 슬라이드 사진 279점과 경판을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에 박물관은 해외 문화재 조사와 환수 업무를 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유물 가치를 판단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재단은 현지 직원을 파견해 경판 유출 과정을 파악하고 진품임을 확인했다.
지난 2월 재단으로부터 유물 반환 의사를 전달받은 신흥사는 인천 능인사 주지 지상 스님을 미국으로 보냈다. 스님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과 함께 록웰 자택을 방문해 조건 없이 경판을 자진 반환한 데 대해 사의를 전했다.
이번에 돌아온 신흥사 경판은 17세기 중·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판 크기는 가로 48.2㎝·세로 18㎝이며,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제반문은 사찰에서 행한 일상의 천도의식과 상용(相容) 의례를 기록한 문서다. 신흥사 제반문 경판은 88장·44점이 존재했다고 전하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됐고 지금은 14점만 남았다.
귀환한 목판은 마지막 부분인 87∼88장에 해당하며, ‘연옥’(連玉)과 ‘김우상양주’(金祐尙兩主)라는 시주자와 관련된 정보가 있다.
신흥사 경판에는 언론인 출신 학자 리영희(1929∼2010)와 얽힌 이야기도 전한다. 리영희는 청년 장교 시절 병사들이 경판을 땔감 삼아 불을 피우는 모습을 본 뒤 지휘관에게 보고해 문화재를 보존했다고 회고했다.
지상 스님은 “리영희 선생이 문화재 보호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다른 한국군도 신흥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들 덕분에 경판은 물론 보물인 신흥사 극락보전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등이 지금까지 남았다”고 말했다.
신흥사 목판이 돌아오면서 한국전쟁 무렵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박물관(LACMA) 소장 신흥사 극락보전 ‘영산회상도’도 귀환할지 관심을 끈다.
신흥사 관계자는 “제반문 경판은 당대 경전 간행 과정과 승려들의 생활상, 불교의례, 인쇄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며 “오늘부터 신흥사 유물전시관에서 전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가적 혼란기에 국외로 나간 성보문화재의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를 위해 사부대중과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