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자들은 아마 토끼몰이 사냥의 기분을 만끽했던 모양이다. 습격 때마다 걸음이 늦어 뒤처지는 노인, 어린애, 그리고 어린애가 딸린 여자의 희생이 컸다. 빨리 못 걷는다고 제 새끼 소 때리듯 때리며 사색이 되어 허둥대다가 총탄에 쓰러진 젊은 아낙들, 쓰러진 어미 곁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마저 총검으로…’.
제주4·3 당시 어린아이였던 현기영 선생의 자전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소설을 인용하면서 말줄임표(…) 처리를 한 것은 서술어가 길어서가 아니다. 너무 참혹해서다. 일제 수탈과 흉년·콜레라가 휩쓸고 간 걸로 모자라 광기 어린 살육극이 같은 민족에 의해 자행됐던 제주도. ‘한라산 백설 위에 낭자히 뿌려진 선혈’ 같은 기억을 써내려간 이 소설은 현 선생의 또 다른 작품 ‘순이 삼촌’과 함께 제주4·3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제주를 향해 사과하기는커녕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지난 2008년 불온서적으로 지정했다. 장병의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하다는 게 이유였다. 군 내부에서도 심하다 싶었는지 육공군의 일부 법무관들이 불온서적 지정에 대해 헌법 소원을 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렸고 국방부는 이들을 지휘 계통 문란을 이유로 징계처리했다.
그랬던 국방부가 2019년 4월3일 마침내 공식 사과했다. 국방부는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물론 이 정도 사과에 관덕정 주변의 불탄 시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부모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71년 전 어린아이들의 공포와 한이 풀릴까 싶지만 그래도 더 이상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한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주4·3만이 아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역사의 순간이 한둘인가. 마주하기 힘든 역사일수록 용기를 내야 한다. 무엇보다 아픈 역사를 정쟁의 도구로 삼으려는 정치 수작을 멈춰야 한다. 이날 제주를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가 추념사에서 언급한 제주 애월읍 영모원 빗돌에 새겨진 글의 울림이 크다.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