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A(47)씨는 얼마 전 휴대폰으로 ‘안마의자 279만원 결제. 해외사용이 정상 승인됐습니다’라는 신용카드 결제문자를 받았다. 구매한 적 없는 안마의자를 보고 깜짝 놀란 A씨는 문자메시지에 안내된 고객센터로 즉시 전화를 걸었다. 고객센터 상담원이라고 밝힌 이는 “고객님의 명의가 도용된 것 같으니 경찰에 대신 신고해 잠시 후 연락이 갈 것”이라고 전했다. 잠시 후 사이버수사대 경찰이라는 B씨가 전화해 “사기사건에 연루됐으니 혐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재산 확인을 위해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B씨의 요구대로 원격조종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해 일회용 비밀번호(OTP)를 B씨에게 불러줬다. 그러자 계좌잔액 1,000만원 이상이 모두 이체됐다. B씨는 A씨의 돈을 모두 대포통장에 이체하고 인출한 뒤 잠적했다. A씨가 처음 전화한 콜센터 역시 가짜였다.
서울 영등포경찰서 지능수사과의 한 경찰관은 “전통적인 사기수법의 보이스피싱범을 잡는 것은 그동안의 노하우가 쌓여 비교적 수월하지만 최근에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고도화돼 대응이 만만찮다”고 말했다. 경찰을 사칭한 B씨처럼 단순 전화를 통해 보이스피싱을 하면 쉽게 추적이 가능한 고전적 수법이다. 영등포경찰서는 보이스피싱범들을 잘 잡아내는 대표 경찰서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나타나는 이동기지국이나 인터넷전화 등을 활용한 범죄는 그들에게도 어려운 과제라는 얘기다.
보이스피싱범을 잡는 지능수사과는 모든 수사기법이 ‘영업비밀’이다. 수사기법이 바깥으로 알려지는 것은 사실상 보이스피싱범들에게 법망을 피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경찰은 다른 일반적 사기 범죄나 폭행 등 형사사건은 범인을 검거하면 홍보 차원의 보도자료를 내지만 보이스피싱을 담당하는 지능수사과의 경우 범인을 잡으면 오히려 ‘쉬쉬’하는 분위기다. 지능수사과 형사들은 “검거 방식을 알려주면 나중에 범인을 잡기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진화하는 보이스피싱범들과의 전쟁은 더 복잡한 두뇌싸움이 됐다. 이전에는 보이스피싱범들의 기지국을 위치 추적해 검거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지국을 차량에 탑재해 수시로 이동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더 나아가 사기범들이 전화 발신 위치를 알 수 없도록 인터넷 연결 등 무선과 유선을 혼용해 쓰기도 한다. 사기범을 잡아 휴대폰을 압수해 유심칩을 살펴봐도 인터넷을 통해 전화연결을 하기 때문에 최초 발신지 추적이 어려워진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범을 검거하고 구속시켜도 큰 죄를 물을 수는 없는 경우도 상당하다”며 “추적이 쉽지 않아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는 이상 얼마큼 피해규모를 일으켰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범을 개별적으로 검거하는 효과가 크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경찰은 ‘보이스피싱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일선 경찰서에서 일개 보이스피싱범을 잡아도 피해는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4,440억원, 피해건수는 7만218건에 달했다. 이는 2017년 피해액 2,431억원, 피해건수 5만13건 대비 각각 2,009억원, 2만205건이나 증가한 수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성화로 지인을 사칭한 메신저피싱의 피해액도 216억원으로 전년 58억원 대비 272%가량 급증했다. 보이스피싱에 이어 신종사기 수법인 ‘SNS 메신저피싱’이라는 새 분야도 경찰이 파고들어야 하는 셈이다.
경찰의 목표대로 뿌리를 뽑기 위해 관계부처와 협조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주로 해외에 근거지를 둔 보이스피싱 우두머리를 잡는 해외공조수사는 외교부의 협조가 필수다. 보이스피싱 계획을 짜고 지휘하는 총책을 검거하지 않는 이상 같은 피해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 2일 부산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보이스피싱 콜센터 관리팀장 C(36)씨 등 15명을 구속하고 중국에 잠적한 총책 등 2명을 인터폴 수배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외교부를 통해 중국 거주인 2명에 대한 여권 무효화 조치를 했으며 중국 공안과 국제 공조를 요청해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관계부처가 경찰과 좀 더 적극적으로 협조에 나설 필요도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보이스피싱 예방 홍보가 주업무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금융감독원의 불법금융대응단은 대포통장을 상습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모아 경찰이 수사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경찰 수사지원은 미흡한 상황이다. 금감원과 경찰의 상시 소통창구는 1명에 불과하다. 현재 불법금융대응단의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에 경감급 경찰이 1명 파견 나가 있는 게 전부다. 금감원 보험사기대응단에도 경찰 1명이 나가 있으나 보이스피싱과는 상관없는 업무를 보고 있다. 특히 경찰이 파견 나가 있는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는 사후조치를 할 뿐이다. 피해자가 보이스피싱이나 유사수신업체로부터 금융사기를 당했으니 자신의 계좌에 돈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곳이라 수사 지원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경찰 관계자는 “금감원 파견경찰은 연락수단일 뿐 적극적으로 수사 지원에 나서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한 제도개선에 더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이스피싱의 필수 수단이 ‘대포폰’이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보이스피싱이 발생해 피해금액을 막기 위해 은행계좌를 막는 사후조치를 취한다면 과기부는 대포폰을 막아 사기를 아예 예방할 수 있는 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1년에 두 차례씩 금감원과 경찰청·금융위·법무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외교부 등과 보이스피싱 방지대책협의회를 열어 종합대책을 만들고 강화하고 있다”며 “올해 상반기 다시 종합대책 회의를 열기 위해 실무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