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회·정당·정책

[토요워치] 특정지역 전략공천…선거때마다 물갈이 되풀이

■공천, 당 살리는 씨앗될까…당 쪼개는 불씨될까

☞'계파정치'에 얼룩진 공천史

민주당 공천 심사위원들이 1988년 3월25일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3김(金) 시대’ 당시에는 ‘보스의 낙점’이 곧 공천이었다.  /연합뉴스민주당 공천 심사위원들이 1988년 3월25일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3김(金) 시대’ 당시에는 ‘보스의 낙점’이 곧 공천이었다. /연합뉴스



정당의 ‘흥망성쇠’와 맥 같이해

편가르기식 다툼이 ‘갈등’ 키워

공천의 역사는 각 정당의 ‘흥망성쇠’와 맥을 같이한다. 그동안 공천은 선거라는 큰일을 앞두고 각 정당이 한데 뭉치도록 하는 촉매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당이 갑자기 둘로 쪼개지거나 하룻밤 만에 새로 생기고 또 사라지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공천 과정에서 빚어진 잦은 다툼이 정당 내에서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해온 탓이다. 공천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배경에는 정당이 특정 지역의 민심을 대변하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토대가 자리하고 있다. 지역·정당에 따라 특정 지역 공천이 곧 당선으로 이어지는 함수관계가 존재해온 터라 여야 정치인을 막론하고 공천에 목을 맨다. 여기에 공익보다 공천 등 사적 이익에 치중하는 ‘편가르기’ 식 계파정치가 맞물리면서 선거 때마다 각종 파동·공천학살이라는 국내 정치의 흑역사가 되풀이됐다. 지역주의·계파정치라는 뿌리 깊은 정치 악습이 매번 선거 때마다 다시 등장하면서 국내 정치사의 오점만 남긴 셈이다.


◇뿌리는 3대 총선…‘정당 정치’ 빛 뒤에는 그림자=현재 우리나라 정당공천제도의 뿌리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제3대 총선(1954년)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203개 의석에서 181명의 공인 후보자를 선정해 발표했다. 큰 틀에서는 오늘날의 정당 공천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 결과 자유당은 114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이는 무소속이 67명, 야당인 민주민국당이 15명을 당선시킨 것과 비교해 압도적인 결과였다. 특히 무소속 의원이 126명 배출된 데 반해 여야가 각각 24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던 제2대 총선과는 180도 다른 성적표다. 그만큼 당시 자유당의 공인 후보 개념은 정당 공천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물론 조직의 중요성까지 확인시켜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폐해도 적지 않았다. 제8대 총선(1971년)에서 야당인 신민당에서 발생한 이른바 ‘진산파동’이 대표적이다. 이는 공천권을 지닌 신민당 당수 유진산 총재가 후보 등록 마감 3분 전 당초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현 비례대표) 기호 1번으로 등록하면서 촉발됐다. 당원의 항의로 유 총재가 일본으로 출국하자 신민당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은 그를 당에서 제외하고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다. 하지만 당시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이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길 것을 제안하면서 당내 분란에 휩싸였다. 결국 신민당은 총선 기간 유세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채 여당인 민주공화당에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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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金) 시대’는 이른바 ‘보스 정치’의 전성기로 꼽힌다. 2000년 16대 총선까지는 당연히 ‘보스의 낙점’이 곧 공천이었다. 주기적으로 ‘공천 헌금’ 파동이 일어났던 것도 ‘공천=당선’이라는 절대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3김 시대 계파정치가 정치 발전을 가로막는 부정적 유물로 꼽히는 이유도 1인 보스가 제왕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조순형(오른쪽) 민주당 대표와 추미애 상임중앙위원이 2004년 3월16일 당사에서 열린 서울지역 확대당직자회의에서 나란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공천 과정에서 생긴 두 사람의 불협화음은 결국 ‘옥새파동’에 이르렀다.  /연합뉴스조순형(오른쪽) 민주당 대표와 추미애 상임중앙위원이 2004년 3월16일 당사에서 열린 서울지역 확대당직자회의에서 나란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공천 과정에서 생긴 두 사람의 불협화음은 결국 ‘옥새파동’에 이르렀다. /연합뉴스


◇‘옥새 파동’ 등 각 계파 보스 사이 대혈투=3김 시대가 저물면서 공천을 둘러싼 계파정치의 구도도 바뀐다. 대통령이나 당 대표 등 ‘절대적 1인’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오히려 2004년 17대 총선부터 공천을 두고 각 계파 보스 간 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른바 공천권을 놓고 벌이는 계파 보스 사이의 ‘피를 부르는 대혈투’다. 첫 무대는 17대 총선에 나서는 새천년민주당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둘로 쪼개진 민주당은 남은 인사들이 한나라당과 손잡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가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이에 조순형 대표는 위기 타개책으로 추미애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머리’가 둘이다 보니 마찰도 잦았다. 보스 간 불협화음은 결국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대표 직인이 찍힌 공직 후보 추천자 명단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는 ‘옥새 파동’에 이르렀다. 양측이 찍은 옥새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냐를 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논의에 돌입했고 결국 선관위는 조 대표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태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민주당은 총선에서 9석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18대 총선에서는 공천 파동의 무대가 한나라당으로 옮겨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당권까지 거머쥔 ‘친이(친이명박)계’는 대권 경쟁자였던 박근혜 당시 의원 측근들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현역의원 128명 가운데 50명이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18대 총선의 한나라당 현역의원 교체율이 역대 최고인 39%를 기록했다. 이는 곧 서청원 의원, 홍사덕 전 의원 등의 탈당에 따른 ‘친박연대’의 출범을 가져왔다. 19대 총선에서는 친이·친박계 사이의 공수가 바뀌었다. 당시 당권을 잡은 친박계가 친이계 출신을 다수 공천에서 탈락시키면서 계파 갈등이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공천장 날인을 거부하는 옥새 파동이 벌어졌다. 이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도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명숙 대표의 취임으로 당권을 잡은 ‘친노(친노무현)계’는 이명박 대통령이 실정을 하고 있어 총선 승리를 확신했다. 이에 따라 이미 공천을 받은 후보를 배제하고 다른 후보를 공천하는 등의 무리수를 여러 차례 뒀다. 하지만 결국 계파 갈등만 노출되면서 패배의 빌미를 자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현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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