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앙드레김(1935~2010)의 흰옷은 특별했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흔히 개성 있고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의 감각을 뽐내거나 아니면 아예 검은색 옷으로 분위기를 내기에, 그의 백색은 유독 빛났다. 앙드레김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 묘사된 일본 니가타현의 눈 쌓인 풍경과 그 순수함에 반해 흰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고, 정갈함을 강조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다는 일화도 전하며, ‘백의민족’의 아름다움을 상징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게 일관된 패션은 얘깃거리를 만들고 의도치 않은 분석으로 이어지곤 한다. 백남준의 패션도 그랬다.
어릴 적 백남준은 3살배기가 셔츠에 정장을 차려입고 찍은 흑백사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부잣집 막내아들의 표상이었다. 음악과 미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부터 30대까지는 양복을 챙겨 입었다. 멋스러웠고 날렵한 몸매에 잘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40대를 지난 중년 이후의 그는 언제나 헐렁한 바지에 멜빵 차림을 즐겼다. 지난 1984년 6월 22일, 백남준이 고국을 떠난 지 35년 만에 금의환향하던 그날도 그는 낡고 구겨진 셔츠에 멜빵을 매고 공항으로 들어섰다.
어깨끈인 멜빵의 정식 명칭은 서스펜더라 한다. 앞에서 보면 ‘11’자, 뒤에서는 ‘Y’자를 그리는 어깨끈이다. 지금이야 멋으로 서스펜더 팬츠를 입는 남성을 종종 볼 수 있지만 그 시절만 해도 다 큰 어른 남자가 멜빵을 매고 다니는 것은 코미디언이 아니고서야 희귀한 모습이었다. 백남준의 경우 어렸을 적 멜빵을 매던 것이 습관처럼 몸에 익었다. 어깨끈의 왼쪽 줄 조금 아래에 옷핀으로 싸구려 손목시계를 매달아뒀다는 점이 좀 남달랐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백남준의 엔지니어로 협업해 온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셔츠 세 번째 단추와 나란한 자리, 항상 같은 자리에 옷핀으로 손목시계를 달아놓고 회중시계를 보듯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고 말한다.
멜빵에 얽힌 희대의 사건이 있다. 그 유명한,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린 일이다. 20여 년 전인 지난 1998년6월2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다. 백악관의 국빈 만찬에 백남준 부부도 초대를 받았다. 199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2년 넘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백남준이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하기 위해 일어나는 순간 그의 바지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순식간이었고 좌중은 당황했다. 백남준보다 클린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백남준이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 부위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를 보도한 외신들은 백남준의 아랫도리를 모자이크 처리해야 했다. 미국 내 일부 케이블TV에서는 이 장면을 방송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언론은 이것을 당시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이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추문에 휩싸인 것을 비판한 ‘백남준다운 퍼포먼스’라 해석했다. 해석 또한 분분했다. 백남준이 클린턴을 비꼰 것이 아니라 ‘괜찮아요. 이렇게 모든 걸 드러낸 나를 봐요. 힘내요’라며 그를 격려한 것이라고 분석한 평론가도 있다. 다채롭게 읽히고 해석되니 이 또한 ‘플럭서스’스럽다. 어쨌거나 백남준만의 풍자적인 해학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 그날 함께 현장에 있었던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는 멜빵을 탓했다.
“백남준이 쓰러진 후, 체중이 줄어 바지가 헐렁해졌다. 의사는 벨트나 바지 걸이로 몸을 너무 조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가 클린턴 대통령 부부에게 인사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그의 바지가 자동적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순전히 사고였다. 그 당시는 대통령과 백악관의 전 인턴사무원과의 섹스 스캔들이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백남준의 거칠고 풍자적인 행위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건을 그의 독특한 퍼포먼스라고 잘못 인식했다. (중략) 백악관 사건 후에 백남준이 (일본 이나모리 재단이 수여하는 국제상인) 쿄토상을 받았을 때 그는 일본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만났는데, 그때 나는 바지 멜빵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꿰매주었다.”
멜빵보다 더 괴이한 것은 백남준의 셔츠 주머니였다. 박영덕 박영덕갤러리 대표는 “헐렁한 와이셔츠에 천을 덧대고 수선해 손바닥 만한 앞주머니를 만들어 입었다”면서 “그 주머니에는 안경과 수첩, 빨간 볼펜, 검은 펜은 물론 안경과 물병까지 넣고 다니셨다”고 회고했다. 이따금 칫솔과 면도기가 꽂혀있던 적도 있고, 둘둘 말린 신문 뭉치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천재의 책상은 그의 머릿속만큼이나 어지럽다”고 얘기해 준 덕에 지저분한 책상에 면죄부가 주어진 것처럼 한국 전쟁 직후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예술인들 사이에는 챙겨입지 못한 허름한 옷차림이 미덕으로 읽힌 시절이 있었다. 때와 장소, 날씨와 계절에 맞춰야 하는 옷차림이건만 그 변수를 상수로 고정하면 그 만큼 시간을 벌어 다른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논리다.
신발도 아주 특이했다. 구두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닌, 그렇다고 고무신도 아닌 ‘백남준 표 검은 신발’이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천으로 만들어 찍찍이로 붙였다 뗐다 신고 벗는 중국제 수제 신발만 신었다”면서 “백남준이 발이 작아 오래 걷기 어려운 데다 볼이 넓쩍하고 발등이 높아 기성 신발은 불편하게 여겼고, 당뇨병으로 발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항상 그 신발만 신었다”고 말한다.
꾸밈없는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백남준은 “남의 시선을 끌지 않는 복장을 하기 위해, 그리고 편한 것이면 뭐든지 내 식대로 만들어 입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백남준의 생각일 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별스럽게 보였다. 백남준 연구자인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는 남루한 행색 때문에 ‘쫓겨난’ 일화를 여럿 목격했다.
1990년에 백남준이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을 만나러 가던 날이었다. 약속하고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청사 경비들이 아래위로 훑어만 볼 뿐 들어가게 해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1993년 6월에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밀라노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백남준의 전시는 팔라초 레알레에서 9시에 개막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같은 날 7시 무디마미술관에서 이우환의 전시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우환을 축하하기 위해 무디마미술관에 일찌감치 도착해서는 미술관 뒤뜰에 벌렁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선 요란하게 코까지 골았다. 관람객의 항의가 접수됐다. 노숙자(homeless)가 미술관에서 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비원이 즉시 나가 그를 깨웠다. 신문 덮고 누운 그는 “조용히 해”라며 맞받아쳤다.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백남준은 “미안합니다. 시차가 안 맞아서 계속 잠이 오는 통에 그만…. 하지만 못 올 사람이 온 건 아니니까…”라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거지패션’을 고집한 백남준을 두고 이용우는 “백남준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해 그런 패션을 연출했고 남들이 다소 웃는다 해도 문제될 것 없으며 남이 즐거우면 더욱 좋은 일”이라고 했다.
늙은 남자가 멜빵을 매든, 와이셔츠를 두 개씩 껴입든, 점잖은 자리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든, 마요네즈와 토마토케첩을 부어 얼굴을 비비든 그게 백남준이다. 그게 그의 멋이고 흥이고 표현방식이다.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얼굴이나 행동이나 그 작업이 백남준의 비범함을 얘기했으니 차려입지 않아도 절로 멋이 배어났다. 개성과 전략을, 일상과 예술을 한 데 비벼 보여준 인간 백남준의 모습이었다.